• 大輔公 諱 金閼智 誕生 說話(대보공휘김알지  탄생설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를 보면 신라 김씨의 시조(始祖)인 김알지(金閼智)에 대한 설명이 있는데 『삼국유사』〈김알지〉 부분은 다음과 같다.

삼국사기[22]

  탈해왕 9년 (65년) 3월에 왕이 밤중에 금성(金城) 서쪽 始林(시림) 숲속에서 닭이 우는 소리를 듣고, 날이 밝자  瓠公(호공)을 보내어  이를 살펴보도록 하였다. 호공이 시림에 다다라 보니  금빛의 작은 궤짝이 나뭇가지에 달려 있고 흰 닭이 그 아래서 울고 있었다. 이 사실을 듣고 왕은 궤짝을 가져오게 하여 열어 보니  조그마한 사내아이가  그 속에 들어 있었는데, 용모가 기이하게 뛰어났다.  왕은 기뻐하여 하늘이 그에게 아들을 내려 보낸 것이라 하여 거두어 길렀으니, 그 아이는 자라감에 따라 총명하고 지략이 뛰어나서  그 이름을 알지라 하였다. 또 금빛 궤짝에 나옴을 연유로 하여 성을 김씨라 부르고, 처음 발견되었던 장소인 시림을 고쳐  鷄林(계림)이라  이름하고, 이로써 국호를 삼았다.

삼국유사[23]

  영평(永平:후한 명제의 연호)) 3년 경신  8월 4일  호공(瓠公)이 밤에 월성(月城) 서리(西里)를 지나다 큰 빛이 시림(始林 : 구림(鳩林)이라고도 함) 가운데서 빛나는 것을 보았다. 자색 구름이 하늘로부터 땅으로 드리워지고, 구름 가운데 황금 궤가 있어 나뭇가지에 걸려 궤에서 빛이 나오고 있었으며, 또 나무 밑에서는 흰 닭이 울고 있었으므로  왕에게 고하였다.

  의식에는 성(星)을 금궤에 담아 하늘 높이 큰 나무 끝에 메달아 놓고 자색 천으로 주변에 구름과 같이 휘장을 둘렀다. 의식은 장엄하게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하늘로부터 궤를 내려 왕이 뚜껑을 여니 성(星)이 누어 있다 일어나서 걸어 나와 석탈해왕을 알현하자 왕은 기뻐하며 성씨를 묻고 본관을 물어보니 성(姓)은 金(짐)이고 본관은 알티(알타이)라고 대답했다.

  이것 저것 물어보니 나이답지 않게 아는 것이 많아 금궤에 나왔다 하여 金氏로 사성(賜姓)하고 그의 본관 음을 가져와 알티를 아는 것이 많고 지혜롭다는 뜻으로 閼智(알지)라 이름 짓고 태자로 삼았다. 황금으로 장식한 마차에 태워 숲에서 나와 왕궁으로 들어가는 연도에 축제 행사가 이어졌다.

  왕권이 강화되었음을 과시하기 위해 문무백관들과 왕족 ,귀족들을 초청해 경사스러운 잔치를 벌이고 뭇 새와 짐승들을 종이와 천으로 만들어 궁으로 행진한 연등놀이를 설화로 기록한 것이다.

  왕이 그 숲으로 행차하여 궤를 열어보니, 사내아이가 누워 있다가 즉시 일어났다. 마치  박혁거세의 고사(혁거세를  알지라고  했음)와  같았기 때문에  그 말로 인하여 알지(閼智)라고 이름 붙였다. 알지란  방언으로 어린아이란 뜻이다. 왕이 수레에 싣고 대궐로 돌아오는데, 새와 짐승들이 서로 따라와  뛰놀고  춤추었다.

  왕이 길일을 가려서 태자로 책봉했으나 뒤에 파사왕(破娑王)에게 사양하고 왕위에 오르지 않았다. 금궤에서 나왔다 하여 이에 성을 김씨(金氏)로 하였다. 알지는 열한(熱漢/대동보에서는 세한 勢漢으로 수록)을 낳고, 열한이 아도(阿都)를 낳고, 아도가 수류(首留)를 낳고, 수류가 욱부(郁部)를 낳고, 욱부가 구도(俱道 또는 仇刀라고 함)를 낳고, 구도가 미추(味鄒)를 낳았는데, 미추가 왕위에 오르니 신라의 김씨는 알지로부터 시작되었다. 

金氏王朝의 樹立 過程 (김씨왕조의 수립과정) [15, 24] 

여러 문헌의 기록과 고고학적 증거들을 종합해 보면 신라인의 구성은 여러 민족이 여러 시기에 걸쳐 혼합되면서 이루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진한-신라 지역에는 선사시대부터 살면서 수많은 고인돌을 남겨 놓은 토착 농경인들, 기원전 3세기 중에 진(秦)나라의 학정을 피해 이민해 온 사람들, 기원전 2세기에 이주해 온 고조선의 유민들, 고구려에게 멸망 당한 낙랑(樂浪)에서 내려온 사람들 등이다.

  신라는 초기에 박(朴), 석(昔), 김(金)의 3개 족단이 서로 왕을 내며 지배체제를 유지했다. 처음에는 박씨가, 그 다음엔 석씨가 왕을 냈고, 그리고 내물마립간 이후 김씨 왕조가 이어졌다. 초기 박·석·김 3성은 서로 협력 및 경쟁관계를 왕권 다툼을 벌였던 것으로 이해된다.

  가장 먼저 왕권을 잡은 것은 박씨였다. 신라의 시조 혁거세는 박씨였다. 박씨 왕조는 남해를 거쳐 유리까지 3대를 이어가다가 4대에 석씨인 탈해에게 왕권(이사금)을 넘겨줬지만, 5대 파사에 이어, 지마(6대), 일성(7대), 아달라(8대)까지 지배권을 이어갔다.

  석씨는 4대 탈해가 왕권을 차지한 뒤 5대부터 박씨에게 넘겨주고, 9대 벌휴에서 다시 왕권을 되찾아 내해, 조분, 점해를 거쳐 13대 미추에서 김씨에게 넘겨준다. 다시 14대 유례에서 석씨가 집권에 성공해 16대 흘해 까지 간다.


  김씨 왕조는 4대 탈해때 시조 김알지의 설화가 나온 후 한참의 시간이 흐른 후 13대 미추이사금을 한번 내고, 17대 내물 이사를 금을 등극시키며 본격적으로 신라의 지배체제를 구축했다. 그런데 4세기 이후 한반도 남부의 사정은 급변하고 있다. 삼한(三韓)은 사라지고 백제와 신라, 가야연맹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

신라는 356년 내물왕 즉위 이후 중국에 사신을 보내는 등 고대 국가의 모습을 뚜렷이 보이고 있다. 내물왕 26년(381) 신라는 북 중국의 유목민족 국가 전진(前秦)에 사신을 보낸다. 삼국사기에는 이때 전진의 황제 부견(符堅)과 신라 사신 위두(衛頭) 간의 대화가 기록돼 있다.

  ‘부견이 위두에게 묻기를 “그대의 말에 해동(海東:신라)의 형편이 옛날과 같지 않다고 하니 무엇을 말함이냐”고 하니 위두가 답하기를 “이는 마치 중국의 시대변혁·명호개역과 같은 것이니 지금이 어찌 예와 같을 수 있으리오”라고 하였다.’
 

  이 기록에 대해 지금까지는 신라가 내물왕 시기에 들어 나라가 크게 발전했음을 보여주는 답변이라고 풀이해 왔지만 일반적으로 시대변혁·명호 개역은 단순히 나라의 체제가 정비된 수준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큰 격변이 있다는 것을 뜻한다.  
 

  이는 이전까지의 석(昔)씨 임금 시대가 끝나고 외부세력이 정권을 장악해 모든 면에서 과거와 완전히 다른 나라가  되었음을 의미하는 말로 해석할 수 있다. 사실 내물왕 이후 석(昔)씨는 신라 역사의 주류에서 사라진다. 왕은 물론 왕비나, 재상, 학자, 장군 가운데서 석씨는 찾아볼 수 없다.

  신라 김씨보다 역사가 오래된 석씨 지만 현대 한국사회에서 석씨는 대단한 희성인데 이는 내물왕 집권기에 석(昔)씨가 철저히 제거됐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학자들이 경주의 적석목곽분 출현을 마립간시대에 북방기마민족이 신라지역에 들어와 지배계급이 되었음을 입증하는 가장 결정적 증거로 제시하고 있음은 충분히 이해할 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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