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氏 王朝樹立 過程

○ 大輔公 閼智 祖上은?(대보공 알지 조상은?)[13]

삼국통일로 민족통일국가를 만든 주체세력 신라 金氏 王族은 북방 草原에서 한반도로 진입한 匈奴族이라는 주장이 정통 고고학계와 역사학계에서 공개적으로 제기되고 있다. 이것이 定說로 되면 한국인의 정체성 의식에 큰 영향을 끼치고 민족사를 보는 시각을 넓혀줄 것이다

신라 김씨의 시조인 김알지는 어떻게 탄생 되었으며 그 조상은 누구일까?
국내 학계 일각에서는 흉노의 왕자 김일제의 후손이 한나라에서 승승장구하다 나중에 왕망의 반한(反漢) 세력에 가담, 신(新, 8∼23)나라 건설 과 멸망 과정에서 멸문지경을 당하자 한반도로 피신해 신라의 지배세력이 됐다는 가설을 펴왔다.

김일제의 7대손 김성한이 신라 김씨의 시조 김알지이며 김일제의 동생 김윤의 5대손 김탕이 가야 김수로왕이 됐다는 것이다. 신라 30대 문무왕 비문(碑文)의 왕실 계보에 ‘투후’라는 말이 나오는 것도 김일제와 신라 김씨 왕실의 혈연관계를 뒷받침하는 근거가 됐다. 또한, 당나라 때 시안(西安)에서 죽은 신라 귀족 여인의 비문에 “(신라) 김씨의 조상이 김일제”라고 쓰여 있는 것을 부산외대 권덕영 교수가 중국 현지에서 찾아내 공개했다.[19]

이러한 김씨 집안의 내력이 ‘대당고김씨부인묘명’에 상세히 기록되어있다. 김씨 부인은 이구라는 당나라 사람의 후처로 들어가 장안에서 살다가 864년에 32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는데, 자신이 살던 섬서성 서안에서 발굴된 그녀의 묘비명에는 신라 김씨의 먼 조상이 소호 금천의 후손으로 흉노 휴도왕의 태자인 김일제라고 밝히고 있다.

김일제와 김알지의 관계는 더 밝혀야 할 숙제가 많겠지만 적어도 9세기 무렵 신라 지배층이 자기들 시조를 흉노의 왕자로 믿고 있었던 것은 분명해졌다. 이와 같이 휴도국의 왕자인 김일제와 김윤의 후손이 신라와 가야로 들어오게 된 배경은 신(新)을 건설한 왕망(王莽)이 김일제의 증손자 당(當)의 이모부였기 때문이다.

신라 김씨의 시조인 김알지는 신라로 들어갔는데 추후 그의 후손인 미추가 신라왕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라 김씨의 내력을 적은 문무왕(文武王)의 능비(陵碑)는 신라김씨가 북방기마민족 즉 천손의 자손이라는 것을 자랑스럽게 새긴 것으로 추정한다. 한반도의 서북, 김해, 제주지방에서 왕망 시대의 화폐 오수전(五銖錢)이 많이 출토되는 것도 이들이 국외로 도피할 때 가져온 것이라는 해석이다.

물론 문무왕 비문에 등장하는 ‘투후의 후손이다’라는 설명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다는 주장도 있다. 많은 학자들이 모화(慕華) 사상에 젖은 문무왕이 자신의 뿌리를 중국에 갖다 댄 것이라고 이를 무시하는 것이다. 하지만 문무왕은 모화사상에 젖은 사람이 아니라 대당(大唐) 결전을 통해서 전성기의 세계제국 당을 한반도에서 물리친 왕이다.

더구나 조갑제는 그가 정말로 모화사상에 젖어 조상의 계보를 조작하려면 왜 하필 한족(漢族)이 싫어하는, 더구나 한을 멸망시키면서 신(新)이라는 새로운 국가를 세우는데 큰 공을 세웠지만 종국에는 후한 광무제에게 철저하게 패배하면서 배척 당하는 흉노족 김일제의 후손이라고 지칭했는가 하고 지적했다.

문무왕의 당당하고 깔끔한 성격에 비쳐 볼 때 『나는 흉노人 金日의 후손이다』고 정직하게 밝힌 것이라고 봄이 더 타당할 것 같다. 즉, 문무왕이 新羅金氏는 흉노족 金日의 후손이라는 뿌리 의식을 갖고 있었다는 의미이다. 이 사실을 믿는다면 新羅金氏의 出自를 둘러싼 의문은 깨끗이 풀린다.

 
  참으로 흥미로운 것은 요사이 들어 많은 정통 학자들이, 역사학·고고학·민속학·언어학·고미술학의 성과를 근거로 하여 문무왕의 新羅金氏 왕족이 흉노계통이라고 주장하고 나서고 있다는 점이다. 그들은 여러 분야의 관점에서 입체적으로 그 가능성을 제기하고 있어 在野학자들의 상상력이 앞선 주장과는 달리 무시할 수 없는 학계의 뚜렷한 흐름이 되고 있다.

이 기록은 신라 왕이 된 신라 김씨의 선조인 김알지가 어떻게 신라로 들어왔는지를 알려준다. 결론적으로 말한다면 김일제의 5대손인 성한왕(星漢王)이 신라 김씨의 시조인 김알지가 되며 김일제의 동생인 윤(倫)의 5대손 탕(湯)이 가야로 들어와 김씨 시조인 김수로가 된다는 것이다.

○ 文武王陵碑(문무왕릉비)[20]

文武王陵碑(문무왕릉비)에는 ‘秺 候祭天之胤(투후제천지윤)이 7代를 전하여’ ‘15代祖 星漢王(성한왕)은 그 바탕이 하늘에서 신라로 내려왔고’라는 구절이 있다. 또한 당나라에 살았던 신라인 김씨부인의 업적을 기리는 ‘大唐故金氏夫人墓銘(대당고김씨부인묘명)’에도 신라김씨의 뿌리가 秺 候金日䃅(투후김일제)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기록으로 볼 때 신라김씨 왕족은 자신의 조상을 한나라 때 투후를 지낸 김일제로 간주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여기서 성한왕(星漢王)과 김알지(金閼智)는 동일인이다.

경주국립박물관에 보관중인 문무왕(文武王)의 능비문(陵碑文)을 보면 문무왕이 북방 기마민족의 후예임을 보다 명백하게 알 수 있다. 「문무대왕릉비」라고 불리는 이 비석은 1796년 정조 20년 경주에서 밭을 갈던 농부에 의해서 발견되었고 당시 경주 부윤이던 홍양호(洪良浩)가 그 비문을 탁본해 당시 지식인들에게 공개했다. 이 비의 건립연대는 대체로 문무왕이 사망한 서기 681년 또는 그 이듬해로 추정한다.

비문의 내용은 대체로 앞면에는 신라 예찬, 신라김씨의 내력, 태종무열왕과 문무왕의 치적, 백제 평정 등이 적혀있고 뒷면에는 문무왕의 유언, 장례, 비명 등이 적혀 있다. 이 비문에 적힌 부분 중 주목되는 내용은 다음과 같다. 그러나 이 비문은 중요성을 인정받지 못하고 일제 강점기에는 빨래대로 사용되다가 두 조각이 되었다고 한다. 불행하게도 글자가 새겨진 상부 쪽은 사라지고 글자가 새겨지지 않은 하부 쪽만 현재 경주박물관에 보관중인데 다행하게도 탁본이 지금까지 전해져 온 것이다.

신라 선조들의 신령스러운 영원(靈源, 김대성은 '신령스런 근원'으로 해석하기보다 투후가 된 김일제가 받은 땅이라고 해석)은 먼 곳으로부터 계승되어온 화관지후(火官之后)니 그 바탕을 창성하게 하여 높은 짜임이 융성하였다. 종(宗)과 지(枝)의 이어짐이 비로소 생겨 영이한 투후는 하늘에 제사지낼 아들로 태어났다. 7대를 전하니 거기서 출자(出自)한 바다.

15대조 성한왕(星漢王, 김알지)은 하늘에서 바탕을 내렸고, 선악(仙岳)으로부터 신령이 비로소 탄생하여 금궁전(金宮殿)에 어림하고 옥란간(玉欄干)을 대하여 처음으로 조상의 복이 상서로운 수풀처럼 많아 석유산(石紐山)을 보는 것 같았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대목은 「侯 祭天之胤傳七葉」이다. 侯는 漢武帝가 흉노와 싸울 때 청년 장군 곽去病(곽거병)에게 포로가 되었던 흉노왕 休屠(휴도)의 아들 金日(김일제)를 가리킨다. 문제는 이 金日가 중국 史書에 등장하는 유명한 흉노人이라는 데 있다. 이 碑文의 문맥상 문무왕 스스로가 우리 조상은 匈奴人 金日라고 밝히고 있는 것으로 해석이 된다.

金日와 그 후손들의 파란만장한 생애는 漢書와 列傳에 실감 나게 쓰여 있고 中國 西安에는 金日의 무덤도 있다. 애매모호한 신화상의 인물이 아니라 실체가 분명한 金日를 문무왕이 『우리 조상이다』고 당당하게 이야기하고 있는데 이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따라서 이 기록은 신라 왕이 된 신라 김씨의 선조인 김알지가 어떻게 신라로 들어왔는지를 알려준다.

○ 秺候 金日䃅(투후 김일제)[15]

한나라의 제후로 흉노족이다. 자는 翁叔(옹숙)이고, 시호는 敬侯(경후)이다. 흉노 선우의 번왕인 休屠王(휴도왕)과 閼氏(알씨)부인의 장남을 태어났다.

기원전 122년 한무제(漢武帝) 때에 곽거병은 감숙(甘肅)지방에 있던 흉노를 공격했다. 흉노의 계속되는 패전에 당시의 이치선우는 그 책임을 물어 휘하의 혼야왕과 휴도왕을 죽이려 했다. 이에 두 왕은 이치선우의 문책이 두려워 한(漢)나라에 항복하려 했는데, 도중에 휴도왕이 항복을 망설였기 때문에 혼야왕이 휴도왕을 죽였다. 휴도왕의 큰아들 일(日, 일제)과 동생 윤(倫)이 어머니와 함께 포로가 되어 한나라에 잡혀가 말 기르는 노예가 되었다.

그 후 무제에게 발탁되어 마감(馬監), 시중(侍中), 부마도위(附馬都衛), 광록대부(光祿大夫)에 올랐다. 그 후 일제는 무제의 경호를 맡을 만큼 신임을 받던 중 무제의 침실에 숨어들어 온 자객과 현장에서 격투를 벌려 체포함으로써 더욱 더 무제의 신임을 받았다. 그 공으로 거기장군(車騎將軍)이 되었고, 제천금인(祭天金人:흉노가 하늘에 제사 지내는 황금으로 된 신상(神像))을 뜻하는 김(金)씨 성을 하사 받았다. 이로써 金日䃅(김일제)는 최초의 김씨로 중국 김씨의 시조이다.

○ 新나라[20]

김일제 증손자 당(當)이 이모부 왕망(汪茫)은 전한 황실의 외척 왕씨의 일원으로, 원제의 황후 효원황후의 비호 아래에서 권력을 장악하였다. 기원전 8년 대사마가 되었고 9세의 평제를 옹립한 후 안한공(安漢公)이 되었다. 그러나 평제를 죽인 다음 유자 영을 세워 스스로 섭정이 되어 가황제(假皇帝)를 자칭하였으며, 8년에는 전한(前漢)을 멸하고 신(新, 8∼23)나라를 세웠다. 그리고 황제에 즉위한다.

당(當)은 왕망에 의해 한왕(漢王)에 봉작 되었고 세습 되어 진 것 같다. 그 후손들은 봉자인 투현의 읍성을 금성(金城)이라고 불렀다. 한나라를 멸망시키고 신을 건설할 때 북방기마민족의 천손임을 자부하는 김씨 일가가 한나라를 멸망시키는데 큰 기여를 한 것은 『한서』〈왕망전〉에도 나와있다.

왕망은 복고주의(復古主義)를 내세워 주례(周禮) 등 유교 경전을 근거로 하는 개혁 정치를 단행하였다. 즉 고전에 입각하여  삼공과  구경  이하의 관직을 제정하고  정전법을 모범으로 하는 한전(限田)정책을 시행함과 동시에  노비  매매를 금지하였으며, 국가 권력에 의해서 물가의 균형책과 전매제를 강화하여 상업을 통제하였고 또한 화폐를 개주(改鑄)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와 같은 개혁 정책은 실정에 맞지 않아 사회는 혼란에 빠졌고, 흉노를 비롯한 대외 정책도 실패했기 때문에 안팎으로 불안과 동요가 고조되었다.

잦은 재해(재위 2·5·11년의  황하  범람)와  호족  세력이 반발하여 각지에서 봉기가 일어났고, 그 결과 적미(赤眉)·녹림(綠林) 등의 농민 반란이 각지에서 발생하였고 또 지방의 여러 호족도 이에 호응하여 봉기하여    왕조 개창 단 15년 만에 후한(後漢) 광무제 유수(光武帝 劉秀)에게 멸망한다(중국은 왕망이 한나라를 멸망시킨 것을 인정하지 않고 광무제가 한나라를 계승했다고 설명하기도 한다).

○ 新羅 流入 課程 및 定着[20]

후한을 세운 광무제는 한나라를 멸망시키는데 큰 공헌을 한 김일제의 후손들을 철저하게 제거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원래 북방 기마민족인 김일제의 후손들 대부분은 자신의 원래 본거지인 휴도국(休屠國)으로 도주하여 성을 왕(王)씨로 바꾸고 살았다.

그런데 광무제에게 쫓긴 김일제의 후손 모두 휴도국으로만 간 것이 아니다. 그 중 당(當)의 직계 후손을 중심으로 한 부족은 약 40년(삼국유사 서기 60년/삼국사기 서기 65년)이란 오랜 도피 생활 끝에 한반도의 사로국에 다다랐다.

도피 생활 중에도 그들은 봉작된 작위를 소중히 여기고 세습해왔다. 당한왕에서 성한왕까지 4대의 봉작 한왕이 이어왔다. 그만큼 그들이 일정한 세력을 가졌고 결속력이 강했음을 볼 수 있다. 그들은 망명지에서 부족의 생존을 위한 능란한 처세술로 당시 新나라의 왕망으로부터 세습작위를 이어갈 김일제의 7대손 성(星)을 사로의 석탈해왕의 양자로 보내기로 사로국과 협상을 하였다.

이 같은 협상은 남해차차웅의 맏딸 아니 공주와 결혼하여 왕의 사위로서 왕이 된 석탈해왕이 왕족과 귀족들에 대해 취약한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것과 맞아 떨어져 협상이 성립되어 서라벌 한 귀퉁이에 봉토로 받아 부족이 거주하게 되고 그곳을 신라라고 하였다. 이주해온 부족만의 수는 사로 6촌에서 크 부족의 인구수를 필적할 것으로 보인다.

어린 성(星)을 석탈해왕의 양자로 주게 됨으로써 김씨 집단은 왕의 인척이 되어 충성할 것을 맹서한 것이다. 입양의식은 호공이 주관이 되어 사로의 시림(始林)에서 성대하게 가졌다. 그 의식에서 하늘의 매개로는 상서로운 흰 닭을 세웠다. 경상도 지방의 경사로운 전통 혼례에서는 혼례상에 닭을 놓고 하늘에 혼약한다.

의식에는 성(星)을 금궤에 담아 하늘 높이 큰 나무 끝에 메달아 놓고 자색 천으로 주변에 구름과 같이 휘장을 둘렀다. 의식은 장엄하게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하늘로부터 궤를 내려 왕이 뚜껑을 여니 성(星)이 누어 있다 일어나서 걸어 나와 석탈해왕을 알현하자 왕은 기뻐하며 성씨를 묻고 본관을 물어보니 성(姓)은 金(짐)이고 본관은 알티(알타이)라고 대답했다. 이것 저것 물어보니 나이답지 않게 아는 것이 많아 금궤에 나왔다 하여 金氏로 사성(賜姓)하고 그의 본관 음을 가져와 알티를 아는 것이 많고 지혜롭다는 뜻으로 閼智(알지)라 이름 짓고 태자로 삼았다. 황금으로 장식한 마차에 태워 숲에서 나와 왕궁으로 들어가는 연도에 축제 행사가 이어졌다.

왕권이 강화되었음을 과시하기 위해 문무백관들과 왕족 ,귀족들을 초청해 경사스러운 잔치를 벌이고 뭇 새와 짐승들을 종이와 천으로 만들어 궁으로 행진한 연등놀이를 설화로 기록한 것이다.

金閼智(김알지)의 후손들은 그를 慶州金氏의 太祖(태조)로,星漢王(성한왕)으로 추앙했다. 이와 같이 휴도국의 왕자인 김일제와 김윤의 후손이 신라와 가야로 들어오게 된 배경은 신(新)을 건설한 왕망(王莽)이 김일제의 증손자 당(當)의 이모부였기 때문이다.

신라김씨의 시조인 김알지는 신라로 들어갔는데 추후 그의 후손인 미추가 신라왕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라김씨의 내력을 적은 문무왕(文武王)의 능비(陵碑)는 신라김씨가 북방 기마민족 즉 천손의 자손이라는 것을 자랑스럽게 새긴 것으로 추정한다. 한반도의 서북, 김해, 제주지방에서 왕망 시대의 화폐 오수전(五銖錢)이 많이 출토되는 것도 이들이 국외로 도피할 때 가져온 것이라는 해석이다.

문무왕 비문에 등장하는 「나는 侯 金日의 후손이다」는 의미의 문장은 이처럼 무시할 수 없는 역사적 실체와 배경을 지니고 있다. 문제는 이 글귀를 액면대로 받아들일 것인가의 여부이다. 많은 학자들은 慕華사상에 젖은 문무왕이 자신의 뿌리를 중국에 갖다 댄 것뿐이라고 무시해왔다. 모화(慕華) 사상에 젖은 문무왕이 자신의 뿌리를 중국에 갖다 댄 것이라고 이를 무시하는 것이다. 하지만 문무왕은 慕華사상에 젖은 사람이 아니라 對唐 결전을 통해서 전성기의 세계 제국 唐을 한반도에서 물리친 自主의 화신이다.

○ 金閼智誕生說話와 遺物 (김알지탄생설화와 유물)[15]

문화 인류 학자들은 북방 알타이의 탄생신화와 김알지 탄생신화에 주목하고 있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궤짝 안에 있던 김알지가 발견된 곳은 시림(始林)으로 다시 말하면 나무가 많은 곳이다. 북방지역에서는 흰색의 자작나무(白樺樹 : 백화수)를 생명(生命)을 의미하는 신수(神樹)로 숭상하는데 일본사람들이 신라를 시라기(白木)라고 부른 것도 이와 같은 뜻이 함축되어 있다고 추정한다.

대보공은 鷄林의 높은 나무에 메달린 황금 궤짝에서 나왔다. 그런데 알타이 지역의 북방민족들의 신화에서도 높은 나무가 등장한다.

문무왕비문에서는 성한왕의 탄생설화가 기록되어 있다.『15대조 성한왕(星漢王)은 하늘에서 바탕을 내렸고, 선악(仙岳)으로부터 신령이 비로소 탄생하여 금궁전(金宮殿)에 어림하고 옥란간(玉欄干)을 대하여 처음으로 조상의 복이 상서로운 수풀처럼 많아 석유산(石紐山)을 보는 것 같았다』 성한왕은 하늘에서 내려왔고, 상서로운 숲으로 내려왔는데 금수레에 좌정하고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두 설화에서 하늘에서 내려왔고, 상서로운 숲과 鷄林, 금수레와 금궤 등 성한왕의 탄생설화는 김알지의 탄생설화와 흡사하다.

『삼국유사』에 석탈해(昔脫解)가 김알지를 안고 대궐로 가는 길에 ‘새와 짐승들이 서로 따라와 뛰놀고 춤추었다’고 쓰여 있는 것도 북방과의 연계를 의미한다. 북방 기마민족들은 새가 인간과 절대자를 연결하는 매개자(媒介者)라고 믿었고 조장(鳥葬)을 치르는 풍속도 같은 맥락에서 나왔다. 그들은 새가 죽은 사람을 하늘나라로 운반해 준다고 믿었다.

신라 금관의 구체적인 형태를 보면, 윗부분은 나무와 사슴의 뿔을 추상화 시켰고 즉 금관의 둥근테 앞면에 <出>자 형태의 나무모양 장식 세개를 세우고 두개의사슴뿔 모양 장식을 세워 지탱하는 것이 신라 금관의 일반적인 양식이다. 신라의 서봉총(瑞鳳塚)은 조생부인(鳥生夫人)의 무덤으로 세 마리의 새(봉황)가 세개의 나뭇가지 끝에 장식된 금관이 출토되었고 천마총과 금관총, 황남총의 금관 장식도 새의 날개 모양이 있다. 새는 쥬신의 대표적인 표상이기도 하다.

신라의 화려한 금관은 세계에 내놓을 만한 자랑거리지만 아직도 풀어야 할 수수께끼가 많다. 그중 하나는 금관이 왜 박(朴) 석(昔) 김(金) 세 왕족 중 유독 김씨 계열 왕릉에서 많이 출토되는가 하는 점이다. 또한, 신라 기마인물형토기에 있는 청동솥은 흉노의 것과 동일하다. 각배(뿔잔), 유리제품, 말 안장 등 중앙아시아 기마민족이 쓰던 물건들이 대량 출토되는 까닭은 무엇일까. 금관과 기마민족 유물들은 김알지의 출신과 어떤 관련이 있는 것일까?

천마총과 황남대총 등이 있는 이 고분군은 신라의 마립간 시대에 축조된 것으로 일명 적석목곽분이 라고도 하는데 몽고 깊숙 지역에서 발굴되는 흉노족 지배층의 경주의 대릉원 무덤 양식과 일치한다.

가장 보수적이라는 무덤 양식의 일치는 두집단의 문화가 깊은 연관성이 있음을 보여준다. 이 고분군이야말로 북방의 기마민족이 유라시아 대륙의 극동지역 맨 끝에 자리한 신라에 도착했다는 것을 결정적으로 증명해주는 것으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 金氏 王朝의 樹立 過程

여러 문헌의 기록과 고고학적 증거들을 종합해 보면 신라인의 구성은 여러 민족이 여러 시기에 걸쳐 혼합되면서 이루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진한-신라 지역에는 선사시대부터 살면서 수많은 고인돌을 남겨 놓은 토착 농경인들, 기원전 3세기 중에 진(秦)나라의 학정을 피해 이민해 온 사람들, 기원전 2세기에 이주해 온 고조선의 유민들, 고구려에게 멸망 당한 낙랑(樂浪)에서 내려온 사람들 등이다.

신라는 초기에 박(朴), 석(昔), 김(金)의 3개 족단이 서로 왕을 내며 지배체제를 유지했다. 처음에는 박씨가, 그다음 석씨가 왕을 냈고, 그리고 내물마립간 이후 김씨 왕조가 이어졌다. 초기 박·석·김 3성은 서로 협력 및 경쟁 관계를 왕권 다툼을 벌였던 것으로 이해된다.

가장 먼저 왕권을 잡은 것은 박씨였다. 신라의 시조 혁거세는 박씨였다. 박씨 왕조는 남해를 거쳐 유리까지 3대를 이어가다가 4대에 석씨인 탈해에게 왕권(이사금)을 넘겨줬지만, 5대 파사에 이어, 지마(6대), 일성(7대), 아달라(8대)까지 지배권을 이어갔다.

석씨는 4대 탈해가 왕권을 차지한 뒤 5대부터 박씨에게 넘겨주고, 9대 벌휴에서 다시 왕권을 되찾아 내해, 조분, 점해를 거쳐 13대 미추에서 김씨에게 넘겨준다. 다시 14대 유례에서 석씨가 집권에 성공해 16대 흘해 까지 간다.


김씨 왕조는 4대 탈해때 시조 김알지의 설화가 나온 후 한참의 시간이 흐른 후 13대 미추이사금을 한번 내고, 17대 내물 이사를 금을 등극시키며 본격적으로 신라의 지배체제를 구축했다. 그런데 4세기 이후 한반도 남부의 사정은 급변하고 있다. 삼한(三韓)은 사라지고 백제와 신라, 가야연맹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

신라는 356년 내물왕 즉위 이후 중국에 사신을 보내는 등 고대 국가의 모습을 뚜렷이 보이고 있다. 내물왕 26년(381) 신라는 북 중국의 유목민족 국가 전진(前秦)에 사신을 보낸다. 삼국사기에는 이때 전진의 황제 부견(符堅)과 신라 사신 위두(衛頭) 간의 대화가 기록돼 있다.

‘부견이 위두에게 묻기를 “그대의 말에 해동(海東:신라)의 형편이 옛날과 같지 않다고 하니 무엇을 말함이냐”고 하니 위두가 답하기를 “이는 마치 중국의 시대변혁·명호개역과 같은 것이니 지금이 어찌 예와 같을 수 있으리오”라고 하였다.’
이 기록에 대해 지금까지는 신라가 내물왕 시기에 들어 나라가 크게 발전했음을 보여주는 답변이라고 풀이해왔지만 일반적으로 시대변혁·명호 개역은 단순히 나라의 체제가 정비된 수준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큰 격변이 있다는 것을 뜻한다.  

이는 이전까지의 석(昔)씨 임금 시대가 끝나고 외부세력이 정권을 장악해 모든 면에서 과거와 완전히 다른 나라가 되었음을 의미하는 말로 해석할 수 있다. 사실 내물왕 이후 석(昔)씨는 신라 역사의 주류에서 사라진다. 왕은 물론 왕비나, 재상, 학자, 장군 가운데서 석씨는 찾아볼 수 없다. 신라 김씨보다 역사가 오래된 석씨지만 현대 한국 사회에서 석씨는 대단한 희성인데 이는 내물왕 집권기에 석(昔)씨가 철저히 제거됐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학자들이 경주의 적석목곽분 출현을 마립간 시대에 북방 기마민족이 신라 지역에 들어와 지배계급이 되었음을 입증하는 가장 결정적 증거로 제시하고 있음은 충분히 이해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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