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승공파 세보

사승공파 세보에 관한 고찰

족보(族譜)란 부계(父系)를 중심으로 혈연(血緣) 관계를 도표식으로 나타낸 한종족의 계보(系譜)로 일명 보첩(譜牒), 세보(世譜) 라고도 한다. 족보는 우리 한국만이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고 문화 민족이면 다 가지고 있다. 중국과 일본은 물론 서구의 영국, 프랑스, 독일을 위시하여 미국과 같이 여러 종족이 모인 나라에서도 족보를 가지고 있다.

우리나라의 족보는 고려 때 부터라고 알려져 있다. 왕실(王室)의 계통을 기록 한데서부터 시작 되었다.고려 중엽 이후로서 김관의(金寬毅)의 왕대실록(王代實錄) 임경숙(任景肅)의 선원록(璿原錄)이 그 효시라 한다. 고려 문종 때 성씨가 없는 사람은 과거에 응시 못하게 했으므로 이때부터 일반에게 성씨가 생겨난 것으로 추정되며 족보가 나오기전에는 가첩(家牒)이나 가승(家乘) 형태로 이어지다가 우리 민간에서 족보다운 체계를 세운 것은 조선 명종(明宗) 1562년 문하유씨(文化柳氏)의 가정보(嘉靖譜)이다. 이 가정보(嘉靖譜)는 족보의 표본(標本)이 되며 다른 문벌(門閥)들의 족보를 편찬하는데 좋은 모형(模型)과 참고가 되여 왔다. 경주김씨 최고(最古)의 族譜(족보)는 1685년(숙종11년)의 乙丑譜(을축보)이다.


○ 을축보 (乙丑譜 : 肅宗十一 1685年)

【譯】상계가 미상함으로 태사공을 선조로 하였다. 경순왕의 후예인 경주김씨 직계파를 상세히 알 수 없다. 오직 태사공파 후세만은 그 대수를 알게 되어 태사공을 비조로 한 것이다. 또 범례중에 경순왕대를 끝으로 신라국이 망한 후 경순왕 후손이 고려조에서 대족을 이루고 있었으나 보첩상에 전해오지 않음으로 세계대가 중절되어 전해오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고려 예종에 이르러 태사공 휘 인관을 시조로 하였다.


○ 갑진보 (甲辰譜 : 正祖八 1784年)

【譯】 공(태사공)은 경순왕의 몇대손인지 모른다. 경순왕이 고려 경종 三年 무인년에 돌아가신지 一三八年 후 예종 을미년에 공께서 낭중 벼슬에 있을때 까지 미루어 볼때 七, 八代가 의실되었다.

또 살펴보건데 조중운 씨족원류에 임경창 성원총록에 이르기를 공께서는 헌강왕의 7세손이라고 하나 그 근거가 어딘지 모르므로 아직도 고증이 불가하다. 또 공께서 정해년에 문장급제 하였다고 하나 고려사를 보면 예종 정해년에는 그러한 과거가 실시된 바가 없고 충목왕 정해년에 김인관이 장원 운운하나 이것은 낙안김씨 원조를 말함이요 동명이인 고로 필시 잘못 알고 잘못 기록된 것이다.


○ 대안군묘지발견사적 (大安君墓誌發見事蹟)

조선조 말 1784년  개성 어느 산기슭에서 우연히 발견된 「김은열 묘지석」을 바탕으로 鷄林君派(계림군파)의 우의정 思穆(사목)이 서술한 김은열 묘지명은 上系 系代確定에 중요한 자료이다.


○ 신미보 (辛未譜 : 高宗八 1871年)

上記(상기) 갑진보(甲辰譜) 기록과 동일하나 疑失(의실) 七, 八代를 三, 四代로 變書(변서)하여 기록 하였다. 族譜를 發行함에 1871년 발간돤 高宗 辛未譜에 의하여 昭穆의 連系를 찾아 世譜를 刊行한다. 즉 현대 족보 발행의 근거 기준이 신미보이다.


○ 을해보 (乙亥譜 : 高宗十二 1857年)

【譯】 태사공을 비조로 하고 경순왕 이하 태사공 이상이 끊기어 수백천세 동안을 가르치지 못하고 재주가 없으니 이것이 즉 중계가 실전된 것으로 실로 통탄할 일이로다.


○ 갑인보 (甲寅譜 : 1914年)

序文을 金有濟(秋史 金正喜의 從孫 성균관장 역임)가 撰(찬)한 甲辰譜(갑진보) 는 敬順王編이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으며 三姓淵源譜(삼성연원보/仁祖20年 1642년)와 동일하게 系代가 기록되어 있으며 특히 괄목할 만한 記事는 太師公이 大安君의 6世孫이란 點이다. 이는 太師公에서 大安君까지 系代 考證(고증)에 중요한 참고 자료가 된다.


○ 新羅三姓淵源譜 (신라삼성연원보)

1642年(仁祖20년) 刊行族譜(간행족보)로 신라계 김씨, 박씨, 석씨 왕과 그 후손들의 系譜(계보)를 기록하고 있으며 太師公에서 大安君까지 系代 考證(고증)에 중요한 참고 자료가 된다.


○ 임술보 (壬戌譜 : 1922年)

上系(상계) 系代(계대) 기록이 다음과 같으며 이 기록은 丁酉譜(1957年), 壬寅譜(1983년), 癸亥譜(1983年) 等의 기록도 同一(동일)하다.


○ 判官公派世譜 (판관공파세보 : 己卯譜 1939年)

1939년 익산파 문중이 발행한 익산파 세보로 宰臣公派(재신공파/재신공:상촌공의 숙부) 松齊公(송제공/사승공과는 8촌) 長子에서 상촌공파 判官公(판관공/사승공의 장형) 次子로 收錄(수록)되어 있으며 族譜 歪曲(족보 왜곡)의 시발점이 된다. 국립 중앙 도서관에 소장되어있다.


○ 司丞公派世譜 (사승공파세보 : 丁酉譜 1957年)

1957년 제작된 丁酉譜(정유보)에 司丞公派 後孫(사승공파 후손)이 수록된다. 이는 忠淸의 名門이었으나 壬辰倭亂(임진왜란) 丁酉再亂(정유재란)의 戰亂과 朝鮮後期 안동김씨의 勢道政治(세도정치), 京釜線開通(경부선개통), 日帝强占期(일제강점기)를 지나며 門中勢는 萎縮(위축)되었고, 또한 交通通信(교통통신)이 不便(불편)한 시대로 늦게 수록되었다. 司丞公의 세째 증조부인 宰臣公(諱 戭)系 後孫들이 族譜를 深이 歪曲(왜곡)하여 公의 長子로, 또한 사승공의 묘소 왜곡하여 大同譜에 둔갑 收錄(수록)하고, 長子로 行世하고있다. (족보왜곡현황 참조)

司丞公派世譜(사승공파세보) / 丁酉譜(정유보) 사승공파 후손들에게는 매우 중요한 자료로, 한국학 중앙 연구원 소장되어 있으며 온라인에 공개되어 있다.


○ 己卯譜 (己卯譜 : 1999年)

今般에 太師公派大同譜를 發刊함에 있어 아직까지 上系 系代가 定立되지 못하고 上系未詳 或은 誤謬된 系代로서 傳承되어 오는 現實情은 痛恨之事로 이번에는 반드시 上系 系代定立 必要性을 切感하여 後世에게 定立된 上系 系代를 傳承케 하기 위하여 本大宗會 理事會에서 擧檢討하여 1998년 11월 10일 만장일치로 태사공이 대안군의 6世孫임을 系代定立하고 慶州金氏 宗報 第二八三號에 發表 揭載하였다.

太師公(태사공)부터 大安君(대안군)까지 上系 系代의 確定



사승공파 계보도


① 사승공 (司丞公)

관련 문서 (http://상촌공후사승공파)참조


② 판관공파 (判官公派)

강릉 판관공(諱 永年)은 아버지 평양소윤公(諱 根)과 첫째 부인인 密陽朴氏 사이에서 長男으로 탄생하였다. 桑村公 생께서 절의를 세운 뒤로부터 집안이 불안했기 때문에 외가를 따라 湖西의 永同으로 이사하였다고 한다. 요즘말로하면 본처인 密陽朴氏係는 후처인 牛峯李氏 세력(?)에 밀려나 외가 쪽인 영동으로 이사를 온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이다[39].

판관공은 외아들 김강(金剛/사직공)을 두었으며 대표적인 문중은 경기도 오산지역에 집성촌을 이루고 있는 내삼미동 경주김씨를 들수있는데 경주김씨의 보첩인 [백절산의 뿌리와 의례]에 의하면 경주김씨가 내삼미동에 정착하게 된 내용을 소개하고 있다. 정략장군 김여천(1619 ~ ?)은 판관공 김영년의 六世孫인 김진의 五子로 충북 영동군 심천면 단구리에서 태어났으며, 미진병마첨절제사(美鎭兵馬僉節制使)로 관직을 위해 왔다가 1640년경 내삼미동에 정착하게 된 것으로 여겨진다. 이에 내삼미동 경주김씨는 정략장군 김여천을 입향조(入鄕祖)로 하고 있다. 경기 오산시 내삼미동 산 42번지에 입향조 정략장군 김여천의 묘소를 중심으로 후손들의 묘소가 능선을 따라 조성되어 있으며 해마다 양력 11월 첫째 일요일 자손들이 모여 시제를 모시고 있다.  

내삼미동 경주김씨의 보첩인 [백절산의 뿌리와 의례]에는 경주김씨의 유래와 김여천이 내삼미동에 입향하게 된 소개, 후손들이 분파되어 나간 내용, 백절산에 묘역을 조성하게 된 사연, 문중의 위선 사업에 대한 소개, 그리고 일반적으로 자손들이 알고 지켜야 할 예절과 제례에 대해 소개하고 있고, 1958년 발행한 [汝天公 家性譜,戊戌譜]가 영인본으로 실려 있으며, 경주김씨 중시조 상촌공 김자수 약전을 소개하고 있다.

대략 내삼미동 경주김씨 선계(先系)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선조(태사공 1세) 기준 대보공 김알지(金閼智)–태사공 김인관(金仁琯)–상촌공 김자수(金自粹, 1351~1413)–판관공 김영년(金永年)–사직공 김강(김剛)-좌승지공 김맹견(金孟堅)-호조참판공 김경(金涇)=공조참의공 김효성(金孝誠)-김진(金鎭)-정략장군 김여천(金汝天, 1619~ ?/내삼미동 입향조)-김식(金植, 1674 ~ ?)–종사랑 김경휘(金慶輝, 1700 ~1755)–훈련원 주부(主簿) 김천성(金天星, 1717 ~1782)–선전관 김광윤(金光潤, 1752 ~1793) – 종사랑 김학주(金學柱, 1789 ~1842)이다. 이렇게 1640년 경부터 약 380여년 간 내삼미동과 동탄면 금곡리 일대에 집성촌을 이루며 살다가 세계(世系)가 분파되면서 격동하는 시대의 흐름에 따라 각지로 분가하여 세거하게 되었다[40].


③ 좌랑공파 (佐郞公派)

호조좌랑공(諱 永源)은 아버지 평양소윤公(諱 根)과 둘째 부인인 牛峯李氏 사이에서 次男으로 출생하였다. 公의 曾孫인 안주목사를 지낸 김연(金堧/1494~?)] 이 안동에 세거하던 집안을 만년 은거지로 서산을 택하였고, 그의 큰 아들인 김호윤(金好尹)이 서산에 터를 잡으면서 자손이 대대로 세거하게 되었다.

16세기 중반까지 경주김씨 가는 서울, 광주 등 근기지역에 거주하며 사환에 종사해 왔고, 분묘 또한 광주, 시흥, 고양 등 경기 일원에 분포하였다. 무과 출신으로 벼슬이 안주목사에 이른 김연은 서흥 현감 재직시에는 임꺽정(林巨正)의 난을 토벌하는데 공을 세운 인물이었다. 특히, 그는 지리학에 밝아 서산의 취령봉(鷲嶺峯) 아래 대교동(大橋洞)에 복거함으로써 경주김씨 일문이 서산에 정착하는 토대를 마련했다. 물론 김연의 서산 복거가 완전한 이주를 뜻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호서지역에 재지적 기반을 마련했다는 점에서는 의의가 크다 [30].

따라서 서산 대교김씨(세칭 한다리김씨)라고 김연(金堧)이 입향조이며 그 후손들에 의해 경주김씨  서산 대교파가 형성되었다. 김연의 4세孫에 이르러 뛰어난 인물들이 배출되면서 가문이 성장하였다. 특히 孫子 단구자 김적(金積)의 네 아들인 충민공(忠愍公) 김홍익(金弘翼), 김홍양, 김홍필, 학주(鶴洲) 김홍욱(金弘郁)은 요직을 거치며 왕실과 내외 척분을 맺어 국중 명문의 반열에 앉게 되었다.

이들은 17세기 이후 서인의 핵심 가문으로 성장하여, 영조 초년에 영의정 김흥경(金興慶)을 배출하고 영조의 딸 화순옹주(和順翁主)를 며느리로 맞는 등 당대 최고의 벌열 가문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김한구의 딸은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1745~1805]로 간택되는 영광을 누리기도 하였다. 경주김씨 가계에서는 200년 동안에 문과 급제자를 32명이나 배출하였다[31].

서산의 사찬읍지 『호산록(湖山錄)』[1619]에는 김연의 아들이자 김호윤의 동생인 김호열(金好說)[1534~?]의 행적에 대한 기록이 매우 자세하다. 김호열은 1564년 생원시에 합격하였으며, 임진왜란 중 서산의 사족들과 함께 의병 활동을하였다. 『호산록』이 편찬된 이후 조선 후기까지 경주 김씨 문중은 서산의 대표적인 유력 가문으로 성장하였다. 김호윤의 아들 김적(金積)이 송곡사에, 김적의 아들인 김홍욱(金弘郁)[1602~1654)]이 성암서원에 배향되고, 정려나 신도비의 건립도 매우 활발하게 이루어지는 등 17세기 이후 크게 번성하였다, 김한구(金漢耉)[1723~1769]의 딸 정순왕후는 정국 운영을 주도한 왕비로 널리 알려져 있다(자랑스러운 상촌공의 後孫 18人, 5~17번 참조)[31].


④ 공평공파 (恭平公派)

공평공(諱 永濡)은 아버지 평양소윤公(諱 根)과 둘째 부인인 우봉이씨 사이에서 4男으로 출생하였다. 자는 택부(澤夫). 할아버지는 판서 김자수(金自粹)이고, 아버지는 소윤(少尹) 김근(金根)이며, 어머니는 이순(李淳)의 딸이다. 지돈녕부사(知敦寧府事) 김점(金漸)의 손서(孫壻)이다. 세종, 문종, 단종, 세조, 예종, 성종 등 여섯 임금을 섬겼으며 성품이 부지런하며 공정한 것을 좋아했다고 한다.

公은 생원으로 丁卯科에 급제하여 사헌부 사동원 홍문관을 거쳐 성균관 대사성 이조참판, 대사헌을 역임하고 좌리원종 일등공신으로 자헌대부가 되어 지중추부사에 이르러 耆社(기사 :70세 이상으로 문과 급제한 문관이어야 하며 王도 70세 이상이면 기사에 들어야한다. 관가의 서열 으뜸으로 여겨 기사에 들어가면 영광으로 여겨왔다)에 들어갔으며 시호는 공평(恭平)이다.

공평공은 청주한씨 한서룡(韓瑞龍)의 딸과 혼인하였는데, 한서룡은 세조대의 원훈(元勳)으로 권력의 핵심부에 있었던 한명회(韓明澮,)와 6촌 간이다. 또한 公의 매제 권마(權摩)는 권근(權近)의 손자로 세조대에 우의정을 지낸 권람(權擥)과 형제간이다. 이렇듯 公은 중앙 관인으로서의 두드러진 활동을 은펼쳐 자신의 영달을 성취하였을 뿐만 아니라 당대 최고의 벌족이었던 청주한씨, 안동권씨와의 통혼을 통해 경주김씨의 명족화를 이룩한 것이다[30].

公의 손자 김세필은 조선 중기 연산군~중종 때의 문신이자 유학자. 형조 판서  등을 지냈다. 자는 공석(公碩)이고, 호는 십청헌(十淸軒), 또는 지비옹(知非翁)이며,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거주지는 서울과 충청도 충주이다. 아버지는 첨정(僉正) 김훈(金薰)이고, 어머니 진천송씨는 군수 송학(宋翯)의 딸이다.

갑자사화 때 연산군의 생모 윤씨를 재헌왕후(齋憲王后)로 책봉하고 종묘에 모시는 것을 반대하다가, 거제도에 유배되었다. 중종반정(中宗反正) 이후 반정 공신  박원종(朴元宗)이 무신 정권을 세우려고 하자 이를 저지하였고, 기묘사화(己卯士禍) 직후에 조광조 일파를 구하려고 중종에게 직언하였다가 경기도 음죽현(陰竹縣) 유춘역(留春驛)에 장배(杖配)되었다.

1522년 풀려났으나 다시는 벼슬에 나가지 않고 고향 충주로 내려가서 십청헌을 짓고 후진을 교육하였다. 그 뒤 공로를 인정하여 이조판서에 추증하고 충주의 팔봉서원(八峰書院)에 향사 되었다.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저서로는 『십청헌집(十淸軒集)』 4권이 있다[21].

公의 증손자 김저(金䃴)는 을사사화  때 원로대신  윤임을 축출하고 득세한 권신  윤원형  등의 모함을 받아 의금부에 끌려가 고문을 받고  안동(安東)으로 유배되었다. 이듬해 6월  고성(固城), 8월  삼수(三水)로 이배 되었다가 또 이듬해 그곳에서 사사(賜死) 되고 가산과 처자도 적몰되었다(자랑스러운 상촌공의 後孫 十七人, 1 ~ 3번 참조) [21].

恭平公은 정부인 청주한씨 사이에서 5男을 두었는데 장남 훈(薰/첨정공파), 2남 훤(萱/수사공파), 3남 명(蓂/판관공파), 4남 시(蓍/평택공파), 5남 평(萍/참봉공파) 이다.

첨정공 김훈(金薰)은 아버지 공평공과 아들 십청헌 김세필(金世弼), 손자 김저(金䃴) 까지 三代에 명문가를 형성하였으나 김저(金䃴)가 을사사화(乙巳士禍)에 연루되어 멸문되었다.

판관공 김명(金蓂)은 판관공의 손자 사과공(司果公) 김무(金碔)가 중종 초 先考의 묘소로 지금의 김포 석탄리 두곡산에 모시면서 시작되었다. 즉 김포 경주김씨는 김무(金碔)가 입향조이며, 벼슬은 용양위 선략장군 병조좌랑(龍驤 衛 宣略將軍 兵曹佐郎;지금의 수도경비사령부 장군)이다. 5世孫 감찰공(監察公) 김여생(金麗生)에서 감찰공파(監察公派)로 분파되었다.

대략 김포 경주김씨 감찰공파 先系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판관공 – 이조좌랑공 김종필(김宗弼) – 사과공 김무(金碔) – 예조정랑지경상감사공 김언영(金彦英) – 감찰공 김여생(金麗生)이다. 사과공 김무(金碔) 차남 김언호(金彦豪)는 전라도 익산에 정착 하였다[38].


⑤ 사마공파 (司馬公派 : 공주파)

사마공 김간(金侃)은 사승공과 숙부인 함양박씨에서 1434년 장남으로 태어났다. 字는 유직(維直)이고 공주 사마소(조선 중기 지방의 생원·진사들이 각 고을에 설립한 자체 협의기구)에서 활동하였으며 이를 계기로 공주에 정착하게 된 것으로 추정된다. 墓所는 공주시 이인면 효제동에 있다.

配位는 숙인 양천 허씨이며 외아들 사마공 김인양(金寅亮)을 두었다. 후손으로는 손자 김경형(金慶亨), 증손자 참봉공 김호(金浩), 고손자 김윤(金尹)이 있다. 이를 끝으로 1999년 간행된 대동보에서는 무단(无簞)처리되었고, 2006년 간행된 경주김씨 태사공파 계통보에서는 六世孫 김선방(金善邦), 七世孫 김진복(金晉福), 八世孫 김춘화(金椿花), 九世孫 김세문(김世文), 十世孫 김한생(金漢生)이 수록되어있다.


⑥ 참판공파 (參判公派 : 의성파)

참판공 김의(金毅)는 사승공과 숙부인 함양박씨에서 1436년(丙辰年) 차남으로 태어났다. 字는 치홍(致弘). 官職은 한림삼사이랑지이조참의공조참판(翰林三司吏郞吏至曹參議工曹參判)이다. 配位는 宜人 전주이씨이며 二男 김창열(金昌烈)과 김광열(金光裂)을 두었다. 경북 의성에 집성촌이 있다.


⑦ 통덕랑공파 (通德郞公派 : 안동파)

통덕랑 김건(金健)은 사승공과 숙부인 함양박씨에서 1439년(己未年) 삼남으로 태어났다. 字는 彦方. 官職은 通德郞(통덕랑)이다. 配位는 坡平尹氏이며 외아들 進仕 김양기(金良基)를 두었다. 경북 안동에 집성촌이 있다.


⑧ 생원공파 (生員公派 : 세종파)

생원공 김부(金副)은 사승공과 숙부인 함양박씨에서 1442년(壬戌年) 사남으로 태어났다. 公께서는 成宗 元年(1469年) 장원급제하였다. 조선 시대에 소과의 하나인 생원시에 합격하면 보통은 성균관에 입학하여 일정 기간 수학한 뒤, 대과인 문과를 거쳐 관직에 나아가는 것이 보통이나, 이를 포기하고 영광군수를 마지막으로 관직을 떠난 아버지와 함께 문의(현 세종시 부강면 노호리,등곡리)에 정착 하였다. 배위는 순흥안씨이고 외아들 충위교위공 김홍견(金弘堅)을 두었으며, 후손들이 이 일대에 집성촌을 이루며 500여 년 이어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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