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조 대보공 김알지

신라김씨시조탄강유사

시조의 諱는 알지(閼智)이니 관직은 大輔(世代系譜에는 太子大輔라고함)로써 世祖王으로 추종(追尊)하였다. 왕비는 마정부인(摩貞夫人) 석씨(昔氏)니 角干 벼슬을 지낸 강조(康造)의 따님이다.

동국사보유(東國史補遺) 이르기를 永平八年 탈해왕 9년(西紀 六五年 乙丑) 봄 3월4일에 호공(瓠公)이라는 사람이 밤에 길을 가다가 금성 서쪽의 시림(始林)의 숲에서  불빛이 환하게 빛나면서 자색 구름이 하늘로부터 땅에 드리우는 가운데 금색의 작은 궤짝이 나뭇가지에 걸려 있으면서 광채가 궤짝으로부터 나오며 또는 흰닭이 나무 아래에서 울므로 호공이 이대로 왕에게 告하니 왕께서 始林에 행차하시어 궤짝을 열어보니 사내아기가 그 속에 있었는데 자태와 용모가 기이하고 컸다. 왕이 기뻐하며 좌우의 신하들에게 말하기를

“이는 어찌 하늘이 나에게 귀한 아들을 준 것이 아니겠는가?”

하고는 안고 돌아오는데 새 떼가 너울너울 춤추듯이 따라왔다. 왕께서 택일하여 태자로 책봉하였는데 자라면서 총명과 지략이 뛰어나므로 이름을 알지(閼智)라 하고, 금궤짝으로부터 나왔기 때문에 성을 김(金)이라 하였으며, 후에 파사(婆娑)에게 왕의 자리를 양보하고 王位에 오르지 아니하였으며 太子 강조(康造)의 딸로서 夫人을 삼았다.시림을 바꾸어 계림(鷄林)이라 이름하고 그것을 나라 이름으로 삼았다.

(東國通鑑에 이르기를 昔脫解王이 金閼智를 雞林에서 얻어다가 궁중에서 길러서 大輔를 제수하였다. 라고 하였다.

○ 東國史畧에 이르기를 신라 제사왕 탈해니사금 9년 을축 3월 4일에 왕이 밤에 금성 서쪽의 시림(始林)의 숲에서 닭 우는 소리를 들었다. 날이 새기를 기다려 호공을 보내어 살펴보게 하였더니, 금빛이 나는 조그만 궤짝이 나뭇가지에 걸려 있고 흰 닭이 그 아래에서 울고 있었다. 호공이 돌아와서 아뢰자, 사람을 시켜 궤짝을 가져와 열어 보았더니 조그만 사내아기가 그 속에 있었는데, 자태와 용모가 기이하고 컸다. 왕이 기뻐하며 좌우의 신하들에게 말하기를

“이는 어찌 하늘이 나에게 귀한 아들을 준 것이 아니겠는가?”

하고는 거두어서 길렀다. 성장하자 총명하고 지략이 많았다. 이에 이름을 알지(閼智)라 하고, 금궤에서 나왔기 때문에 성을 김(金)이라 하였으며, 시림을 바꾸어 계림(鷄林)이라 이름하고 그것을 나라 이름으로 삼았다. 太子 강조(康造)의 딸로서 閼智의 夫人을 삼았으니 摩貞夫人이다. 7世孫 미추(味鄒)에 이르러 신라 임금 12대 点海王의 代를 이어서 미추왕(味鄒王)이 되었다.

○ 최해(崔瀣)가 이르기를 金氏가 貴族이 된것은 대게 신라 초기에 일어났는데 세속에서 전하기를 하늘로부터 금궤가 내려왔으므로 金氏 성이 되었다고 하였고 또 이르기를 소호금천씨(少昊金天氏)의 후손이라서 김씨가 되었다고 하였다.

(점필재 金宗直이 이르기를 金閼智가 금궤에서 나왔으므로 김씨라 賜姓하였다라고 하였고 或은 金天氏의 후손이라 이르지만 首露王은 한나라 광무 임금 건무 壬寅年 에 건국하였고 大輔는 明帝 임금 永平 乙丑에 誕生하였으니 그 사이가 불과 24年이라면 대게 한 時節의 사람이니 大輔를 首露王의 후손이라고 하는 반드시 이런 이치가 없을 것이다.)

대보공 탄강유허비명

신라가 역사가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은 세상 사람들이 역사를 읽지 않음에 있는 것이다. 신라가 朴昔金 三姓이 나라를 세운지 천년이 되었고 鷄林은 즉, 閼智가 탄생한 땅이니 지금의 영남지방인 慶州府에 속하여 있으며 세상에서 金으로 氏를 삼은 사람은 모두 다 閼智로써 시조를 삼으니 지금의 그 땅에 전하여 그 世次와 沿革의 史冊에 기재된 것이 상세치 않으나 이제 그 碑銘을 자료로 하여 대게 알게 된 것이다.

처음에 脫解王시대에 시림(始林)의 숲에서  닭  우는 소리를 듣고 금궤를 얻어 열어보고 어린 사내아기가 있음을 살펴보고 거두어서 길러서 이름을 알지(閼智)라 하고, 성을  金이라 하였으며, 始林을 바꾸어 鷄林이라 고치었다.

七世孫 味鄒(미추)에 이르러 助賁王(조분왕)의 사위가 되었는데 助賁王이 아들이 없어서 味鄒王이 대리로 王이 되어 尼師今(이사금)이라 칭호하였다. 味鄒王으로 부터 奈勿王과 實聖王을 지나 訥祗王에 이르러 尼師今을 麻立干(마립간)으로 칭호를 하고 백성의 의복제도와 牛車의 사용법을 가르치었다. 訥祗가 薨(훙 : 왕,제후의 서거를 뜻함) 하시고 아들인 慈悲(자비)가 麻立干이 되었다. 慈悲가 薨하고 아들 炤智(소지)가 麻立干이 되어 비로소 시장을 개설하고 &房(지금의 상점)을 두게하여 四方의 物貨가 서로 통하게 하였다.

炤智가 薨하고 아들 智證이 麻立干이 되어 사람의 殉葬(순장 : 죽은 사람을 위하여 살아있는 사람을 죽은 사람을 따라 매장시킴)을 금하고 州郡에 命하여 농사를 권장하고 비로소 소를 사용하여 田畓을 갈게하였고 국호를 신라로 정하고 方語(사투리)를 고치게 하여, 尼師今이라 호칭하는 것과 麻立干이라 호칭하는 것을 王이라 호칭하게 하였고, 喪服을 제정하였다 王이 薨하니 諡號(시호)를 智證이라 하니, 諡法(시법 : 諡는 王이 흉하신 後에 別로 號를 定함)이 이때부터 시행되었다. 智證王의 아들 法興王이 서서 법률을 頒布(반포)하고 百官의 公服을 제정하였고, 年號를 建元(건원)이라 하였다.

眞興王과 眞智王을 지나 眞平王에 이르러 아들이 없어서 善德女王이 王位에 나아가 귀족의 자제를 당나라에 파견하여 국학에 입학을 청원하여 유학케하였다. 善德女王이 薨(훙)하고 眞德女王이 즉위하시니 眞平王의 妻母인 國飯의 딸이시다. 처음으로 당나라의 제도를 모방하여 관복을 만들었고 사신을 당나라에 보내어 백제가 破한 것을 보고하였으며, 왕이 스스로 太平을 頌德(송덕)히는 織錦文(직금문)을 지어서 바치니 唐 高宗이 嘉尙히 생각하였다 하며 중국의 年號를 비로소 행하였다. 眞德女王이 薨하고 太宗武烈王이 王位에 나가니 眞智王의 손자 仁問이 唐將 蘇定方(소정방)과 함께 백제를 滅하다.

武烈王이 薨(훙)하고, 아들 文武王이 즉위하여 부녀자에게 명령하여 중국의 의상(저고리 치마)를 입게 하여 당나라 군사와 같이 고구려를 滅하였으며, 曆法(역법 : 월력 또는 日曆)을 頒布하고 모든 官印(관인)을 鑄造(주조 : 쇠물을 부어 만든 것)하였으며, 文武王이 薨하고 아들 神文王이 즉위하여 사신을 보내어 당나라에 들어가 禮典(예전 : 禮曹의예약, 제사, 연향, 조빙, 과거 등 여섯가지 사무를 규정한 책)과 詞章(사장 : 文章과 詩歌)을 청하니 天后 명령하여 吉凶要禮를 文祠에서 고르고 規誡(규계)에서 거친것 五十餘券을 부지런히 만들어서 賜(사)하시었다.

神文王으로부터 孝昭王을 지나 聖德王에 이르러 漏刻(루각 : 즉물 시계)을 만들었고, 孝成王을 지나 景德王 ․ 惠恭王을 거쳐 宣德王을 지나 元聖王에 이르러 讀書出身法(독서출신법 : 글을 읽어야 벼슬을 핳 수 있는 法)을 정하고, 元聖王으로부터 昭聖王 ․ 哀莊王 ․ 憲德王 ․ 興德王 ․ 僖康王 ․ 閔哀王 ․ 神德王 ․ 文聖王 ․ 憲安王 ․ 景文王 ․ 憲康王 ․ 定康王 ․ 眞聖王 ․ 孝恭王을 지나 敬順王에 이르러 高麗에 讓與(양여)하려 할 때 왕자가 不可하다 하니 왕이 이르시길 寡人(과인 : 임금이 겸손하여 자칭 하는 말 寡德之人)이 외롭고 위태하여 형세가 완전치 않으니 죄없는 백성을 비참하게 죽게 함을 내 차마 못함이라 하시고, 侍郞 金封休(시랑 김봉휴)를 고려에 보내 上書하여 稱臣을 하니, 國柞(국작 : 나라의 地位)가 드디어 끊어지니 金氏가 三十八世에 무릇 五百 八十八年을 지남이라. 대게 朴氏, 昔氏를 계승하여 왕위에 오른 후 나랄를 누림이 길고 대략 禮樂과 문물이 신라로부터 일어남이라.

신라가 비로소 당나라와 서로 우호국이 됨에 중국의 史官의 법이 마련함이 이미 오래 되었으나 東國이 떨어지고 孤陋(고누)하여 事蹟은 많으나 文章이 없어서 傳하지 못한 것이 많더니 고려의 金富軾이 고려사를 지었으나 그 글이 간략하여 학자가 전공치 않았으며, 또 板本이 오래되어 헐고 찌그러져 세상에 남아 있는 것이 거의 드믈어서 君子들이 크게 두려워 하던 바, 南公轍이 慶尙監司로 있을 때 參奉 金成杰이 慶州에서 鷄林의 紀蹟의 글을 청하니 잘하는 일이로다.

根本을 推仰함을 멀리하니 이 땅에 전하려니와 이 땅에서 이 일이 또한 큰 것이라 어찌 써 주지 않으리오? 공자께서 주나라에 탄생하시었으되 丘는 은나라 사람이라 스스로 微子의 자손이라 히시고, 또 말씀하시기를 夏나라이 禮는 可히 말하거니와 杞(주나라 시대의 국명, 夏나라의 禹王의 자손의 領土로 現今의 河南省 縣祀)나라는 足히 고증을 하지 못하며 은나라의 禮는 능히 말할 수 있으나 宋(微子良가 세운 나라로서 河南省者商邱縣)나라는 足히 고증치 못하는 것은 문헌이 부족한 때문이라 하셨으니, 이제 金氏가 사방에 헤어져 사는 것이 무려 천백여 호가 되며 신라로써 다 시조로 삼으니, 공자께서 은나라에 있느거나 다름이 없음이라.

뒤에 이 碑銘을 잘 읽으면 거의 취하여 史記에 闕함을 보충함이 있으리라. 銘에 이르되, 저 무성한 鷄林은 왕업을 일으킨 터전이로다. 누가 감히 공경치 않으리오. 나의 이 碑銘을?[29]

워드프레스닷컴으로 이처럼 사이트 디자인
시작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