新羅 建國 過程 (신라 건국 과정)

신라는 서기전 57년(혁거세거서간 1)부터 935년(경순왕 9)까지 56대 992년간 존속했던 고대 왕조이다.

경주평야에 자리하던 여섯 씨족이 연합한 성읍 국가로 건국했다. 가야를 합병하고 중국과의 교통로인 한강 유역을 점령하여 강성해졌다. 7세기 중엽 당을 끌어들여 백제와 고구려를 평정하고 발해와 함께 남북국시대를 열었다. 하대에 들어 왕위계승을 둘러싼 내분이 반복되고 호족세력이 대두하면서 왕권이 약해져 중앙집권적 국가로서 존립하기 어려워졌으며 결국 후삼국으로 나뉘었다가 경순왕이 고려의 왕건에게 스스로 넘겨줌으로써 신라 왕조는 접게된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서는 고조선의 유민인 진한 6촌장이 자신들을 다스려줄 임금을 원하고 있을 때, 하늘에서 내려온 알에서 태어난 혁거세를 맞이하여 기원전 57년 4월에 거서간(임금)으로 세운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급량 출신인 혁거세(후에 박씨)는 사량 출신의 알영(후에 김씨)과 혼인했다고 한다. 이는 경주 지역의 토착민 집단과 유이민 집단의 결합으로 해석된다.[15]

신라는 처음 진한의 12개 소국의 하나인 사로국(斯盧國)에서 출발하였다. 기원전 27년에는 성을 쌓게 하고 금성(金城)이라 불렀다. 이후 동해안으로 들어온 석탈해 집단이 등장하면서 박, 석, 김의 세 가문이 교대로 왕위를 차지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유력 집단의 우두머리는 이사금(군주)으로 추대되었고, 주요 집단들은 독자적인 세력 기반을 유지하고 있었다.

이와 같이 신라의 건국 과정을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를 중심으로 살펴보기로 한다.

① 사로육촌 (斯盧六村)

삼한시대에 진한(辰韓)의 한 소국인 사로국(斯盧國)을 구성했던 6개의 촌락(村落)으로 사로6촌(斯盧六村)은 서벌6촌(徐伐六村)이라고도 한다. 이들 6촌(六村)은 경주평야에 자리잡고 있던 급량(及梁) · 사량(沙梁) · 본피(本彼) · 모량(牟梁, 혹은 漸梁) · 한기(漢岐, 혹은 漢祉) · 습비(習比) 등 여섯 씨족의 후예들로 구성된 것 같다. 이들은 처음 평야 주위의 산이나 구릉지대에서 취락 생활을 하다가, 점차 평야지대로 생활권을 옮기는 과정에서 국가 형성의 길이 열리게 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또한 6촌은 6촌장(六村長)에 의해 다스려졌다. 6촌장은 각기 천강신화(天降神話)를 소유하고, 이를 지배력의 기반으로 삼아 대대로 각자의 촌락을 다스린 사로 지역의 전통적 존장자였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 따르면, 알천양산촌(閼川楊山村) · 돌산고허촌(突山高墟村) · 취산진지촌(觜山珍支村) · 무산대수촌(茂山大樹村) · 금산가리촌(金山加利村) · 명활산고야촌(明活山高耶村)의 6개 촌이 있었으며, 32년(유리이사금 9)에 6부(六部)로 고쳤다고 한다.

新羅六部長遺事 (신라육부장유사)

삼국유사에 이르기를 진한 땅에 옛날 육촌이 있었으니 첫째 알천(閼川) 양산촌장(楊山村長)에 알평(謁平)이니 처음 표암봉(瓢巖奉)에 내려와 급양부(及梁部) 李氏의 祖가 되고, 둘째 돌산고허촌장(突山高壚村長)에 소벌도리(蘇伐都利)니 처음 형산(兄山)에 내려와 사량부(沙梁部) 崔氏의 祖가 되고, 셋째 무산대수촌장(茂山大樹村長)에 구례마(俱禮馬)니 처음 이산(伊山)에 내려와 모량부(牟梁部) 孫氏의 祖가 되고, 넷째 자산진지촌장(觜山珍支村長)에 지백호(智伯虎)니 처음 화산(花山)에 내려와 본피부(本彼部) 鄭氏의 祖가 되고, 다섯째 금산가리촌장(金山加利村長)에 지타(紙陀)니 처음 명활산(明活山)에 내려와 한기부(漢岐部) 裵氏의 祖가 되고, 여섯째 명활산고나촌장(明活山高那村長)에 호진(虎珍)이니 처음 금강산(金剛山)에 내려와 습비부(習比部) 薛氏의 祖가 되다.

○ 동국사략에 이르기를 조선(朝鮮)의 백성이 동해빈(東海濱)에 사는데 六村으로 나누니 辰韓의 六部가 되었다. 六部가 알천(閼川)에 모여 상의하여 가로대 우리들이 임금이 없어서 백성이 다 망종하고 무례하니 유덕한 사람을 군주로 선출하기로하고 고허촌장소벌공(高墟村長蘇伐公)等이 박혁거세를 존립(尊立)하여 임금으로 모시고 진한국에 도읍을 하다. 이때는 한선제오봉원년갑자(漢宣帝五鳳元年甲子)이니 단군기원(檀君紀元) 2277年이고 서기 B∙C 57年이었다.

○ 동국통감에 이르기를 신라 유리왕(琉璃王) 9년은 한건무(漢建武) 8년임진(壬辰)이니 단기(檀紀) 2365년이고 서기(西紀)로는 32년이다. 그 해에 육부명(六部名)을 고치고 六姓을 주니, 양산부(梁山部)를 급양(及梁)로 고치고 姓을 李氏라 하고 고허부(高墟部)를 사량(沙梁)으로 고치고 姓을 崔氏라 하고 대수부(大樹部)를 모량(牟梁)으로 고치고 姓을 孫氏라 하고 진지부(珍支部)를 본피(本彼)로 고치고 姓을 鄭氏라 하고 가리부(加利部)를 한기(漢岐)로 고치고 姓을 裵氏라 하고 명활부(明活部)를 습비(習比)로 고치고 姓을 薛氏라 하다.

新羅六部長 (신라육부장)

新羅佐命功臣六部大人 (신라좌명공신육부대인)

李謁平 (이알평)  初降于瓢巖峰하여 爲閼川楊山村長하니 是時에 古朝鮮流民이 分居東海濱 出谷하여 爲六村하니 各六村長하고 無君長일세 公與五村長으로 齊休하고 禱于 天三日에 仙桃聖母가 誕始祖王子蘿井하니 奉養十三年甲子夏四月丙辰에 推立爲君하다. 攝政四十年하고 有開國佐命之功하니 至儒理王朝하여 賜姓李氏하고 以楊山村으로 爲及梁部하고 以長으로 爲大人하다.

崔蘇伐都利 (최소벌도리)  初降于兄山하여 爲突山高墟村長하니 公이 寸長으로 奉養始祖王하여 尤有育勤之恩하고 又有開國佐命之功하니 至儒理王朝하여 賜姓崔氏하고 以高墟村으로 爲沙梁部하고 以長으로 爲大人하다.

孫俱禮 (손구례)  初降于伊山하여 爲茂山大樹村長하니 公이 同與寸長으로 奉養始祖王하고 又有開國佐命之功하니 至儒理王朝하여 賜姓孫氏하고 以大樹村으로 爲漸梁部(一云牟梁)하고 以長으로 爲大人하다.

鄭智伯虎 (정지백호)  初降于花山하여 爲拜山珍支村長하니 公이 同與寸長으로 奉養始祖王하고 有開國佐命之功하니 至儒理王朝하여 賜姓鄭氏하고 以珍支村으로 爲本彼部하고 以長으로 爲大人하다.

裵祗陀 (배지타)  初降于明活山하여 爲金山加利村長하니 公이 同與寸長으로 奉養始祖王하고 有開國佐命之功하니 至儒理王朝하여 賜姓裵氏하고 以加利村으로 爲漢祗部(一云漢岐部)하고 以長으로 爲大人하다.

薛虎珍 (설호진)  初降于金剛山하여 爲明活山高那村長하니 公이 同與寸長으로 奉養始祖王하고 有開國佐命之功하니 至儒理王朝하여 賜姓薛氏하고 以高村那으로 爲習比部하고 以長으로 爲大人하다.

② 박씨왕조 수립

『삼국사기(三國史記)』와 『삼국유사(三國遺事)』에는 다음과 같은 건국신화(建國神話)가 있다.

“서기전 69년 3월 1일 당시 사로 6촌(斯盧六村)의 촌장(村長)들이 자제를 거느리고 알천(閼川) 언덕 위에 모였다. 그들은 임금을 모시어 나라를 세우고 도읍을 정할 것을 논의하고 있었다. 이 때 양산(楊山) 밑 나정(蘿井)이라는 우물 근처에 신기한 빛이 하늘에서 땅에 닿도록 비추고 있었다.

그리고 흰말〔白馬〕 한 마리가 꿇어앉아 절하는 형상을 하고 있었다. 거기에는 커다란 알이 하나 있었다. 말이 하늘로 날아가자 사내아이가 알을 깨고 나왔다. 그런데 모양이 단정하고 아름다웠다. 동천(東泉)에 목욕시켰더니 몸에서 광채가 나고 새와 짐승들이 춤을 추었다. 이 아이가 박혁거세이다.

알의 크기가 박[瓠]과 같아 성을 박(朴)이라 하였다. 또한, 그 광채로 인해 이름을 혁거세 혹은 불구내(弗矩內)라고 하였다. 고허촌(高墟村) 촌장인 소벌공(蘇伐公: 蘇伐都利)이 데리고 가서 길렀다. 6촌의 촌장들은 신비롭고 기이하게 여겨 존경하였다.

나이 13세가 되자 이들에 의해 왕으로 추대되었다. 이때 왕의 칭호는 거서간 또는 거슬한(居瑟邯)이라 하였다. 또한, 나라이름을 서나벌(徐那伐) · 서라벌(徐羅伐) · 서벌(徐伐) 혹은 사라(斯羅) · 사로(斯盧)라 하였다. 그리고 서기전 53년(혁거세거서간 5) 알영(閼英)을 비(妃)로 맞아들였다.”

이 건국신화는 성읍국가(城邑國家) 단계를 반영하는 것이다. 즉, 6촌장이란 이미 신라의 개국(開國) 이전에 나뉘어 살았던 고조선(古朝鮮)의 유민들이었다. 따라서, 토착 세력을 압도한 유이민(流移民) 박씨 집단을 상정할 수 있다. 또한 급량 출신인 혁거세(赫居世, 일명 弗矩內)와 사량 출신의 알영(閼英)과 혼인했다고 한다. 이것을 보면 처음 신라는 여섯 씨족 가운데 급량과 사량의 두 씨족을 중심으로 성립된 것을 알 수 있다. 두 씨족은 후에 성씨제가 도입되었을 때 각기 박씨 · 김씨를 칭하였다.

박씨 집단은 말[馬]및 천신하강(天神下降)의 모티브로 볼 때, 이들은 말을 토템으로 하는 천신족(天神族)으로 볼 수 있다. 이것은 혁거세 · 불구내 등이 광명을 의미한다는 데서도 그들의 ‘태양숭배사상’을 엿볼 수 있다.

新羅朴氏遺事 (신라박씨유사)

삼국사에 진한 땅에 예로부터 육촌이 있으니 첫째 알천 양산촌(지금 월남리)이며 촌장은 알평(謁平, 及梁部 李氏의 시조)이고, 둘째 돌산 고허촌 이며 촌장은 소벌도리(소벌도리(蘇伐都利, 沙梁部 崔氏의 시조)이며, 셋째 무산대수 촌장 구례마(俱禮馬, 牟梁部 孫氏 의 시조)이고, 넷째 자산진지 촌장 지백호(智伯虎, 本彼部 鄭氏의 시조)이며, 다섯째 금산가리촌장 지타(지타 韓岐部 裵氏의 시조)이고, 여섯째 명활산고나촌장 호진(虎珍 習比部 薛氏의 시조)이다.

신라 박혁거세 원년 BC 69년(漢宣帝 五鳳 元年) 壬子년 3월 초 1일에 육부의 촌장들이 알천 언덕에 모여 회의하기를 우리들은 위로 군왕이 없어서 백성들이 자유로 방임되어 있으니 유덕한 사람을 찾아서 왕을 삼아 국가를 건설하고 교화를 펴야 되지 않겠는가 한즉,

이때에 고헌촌장 소벌공이 <양산 기슭을 바라보니 나정 곁의 숲속에서 기이한 서기가 비치고 백마가 꿇어 엎드려 울거늘 가보니 크기가 포(匏)만한 큰 알이 있었으며, 백마가 사람을 보고 하늘로 올라가매 그 알을 쪼개니 어린 아이가 있어 데려다 기르게 되었다. 그의 나이가 십여세가 되니 헌걸차게 잘 생기고 숙성하니 육부 사람들이 그 출생이 신기하고 이상하다 하여 추대하여 높이고 왕을 삼다. 이날 사량부에 있는 알영정(閼英井)에 용이 동녀를 탄생시킨바 자색과 용모가 왕과 같이 아름다우니 이에 남산 기슭(지금의 창림사지)에 궁궐을 지어 두 성아(聖兒)를 봉양하게 하다.

알에서 남아가 나오고 알의 크기가 박 만하여 박이라 하다가 朴으로써 성을 삼고 이름을 혁거세(赫居世)라 하고, 우물에서 나온 까닭에 이름을 알영부인(閼英夫人)이라 하다.

나이 十三세에 한선제 오봉원년 갑자(B∙C 57) 4월 병진일에 임금으로 세우고 호를 거서간(居西干)이라 하다. 용이 낳은 여아로써 后를 삼고 국호를 서라벌(徐羅伐 또는 徐伐)이라 하다. 왕이 재위 六十一년에 居西干이 승하 하니 사릉(蛇陵 지금의 운암사 북쪽 오릉)에 안장하다.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이르되 왕이 재위 六十一년에 이금이 돌아간 후 七日에 유해가 흩어져서 땅에 떨어지고 后 또 승하하다. 나라 사람들이 시체를 합하여 장례를 지내려 하였는데 큰 뱀이 유골을 합하지 못하게 하므로 오체(五體)를 다섯 능에 묻고 사릉(蛇陵)이라고 이름을 지었다.

➂ 석씨왕조 수립

『삼국유사』 권1 기이(紀異) 탈해왕조와 『삼국사기』 신라본기 제1의 탈해이사금조가 주된 자료이나, 『삼국유사』 권2의 가락국기에도 탈해왕에 관한 기록이 조금 있다. 이 신화의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남해왕 때에 아진포에 혁거세왕에게 해산물을 바치던 아진의선(阿珍義先)이라는 노파가 살고 있었는데, 어느 날 문득 바다에서 까치들이 떼를 지어 날며 우짖고 있음을 보았다. 이상히 여긴 노파가 살펴보았더니 거기에 배 한 척이 있었고 배 안에 큰 궤짝이 있었다.

궤짝을 열어보니, 그 속에 단정하게 생긴 한 사내아이와 그 밖에 여러 보물, 노비들이 들어 있었다. 그 사내아이를 7일 동안 보살펴 주자, 스스로 입을 열어 말하기를 “나는 본디 용성국(龍城國)사람이다. 그 나라의 왕비에게서 알로 태어났으므로 버림을 받아 이곳에 닿았다.”고 하였다.

그 아이는 말을 마치자 지팡이를 끌고 두 사람의 종과 더불어 토함산에 올라가 거기다 돌무덤을 파고 7일 동안 머물렀다. 그런 뒤에 산을 내려와 성 안을 살펴 살 만한 곳을 물색하던 중 호공(瓠公)의 집에 다다랐다.

그는 호공의 집 곁에 남몰래 숫돌과 숯을 묻고서, 이튿날 아침 관가에다 그 집은 자신의 조상이 대대로 살았던 집이었는데 자신이 잠시 집을 비운 사이 호공이 들어와 차지한 것이라고 송사를 제기하였다. 그는 숫돌과 숯을 증거물로 제시하여 그 집을 차지하게 되고 그 소문이 나자 남해왕은 이 사람(탈해)이 슬기로운 사람이라고 생각하여 그를 맏공주와 배필이 되게 하였다.

이상이 이 신화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석탈해가 남해왕의 사위가 된 것이 뒷날 그가 왕위에 오를 수 있는 계기가 되었음은 말할 나위가 없다.

신라의 지배층은 동해안 쪽으로부터 진출해온 탈해(脫解) 영도하의 새로운 세력에 의해 제압당했는데, 역사서에는 이를 석씨(昔氏)라 칭하고 있다. 다만 탈해 집단은 부족적인 기반이 미약했으므로 곧 종래의 지배층에 의해 교체되었다.

新羅昔氏遺事 (신라석씨유사)

삼국사에 이르되 석탈해(昔脫解)는 본래 다파나국(多婆那國) 사람이다. 다파나국은 일본에서 동북쪽으로 일천리 밖에 있고 그 나라 왕인 함달파(含達婆)가 여국왕의 딸을 아내로 삼아 임신한지 칠년 만에 대란(大卵)을 낳으니 상서롭지 않은 징조라 하여 버리라 하니 그 아내가 비단으로 싸고 또 보물을 궤속에 넣어서 바다에 띄우니, 바람과 파도에 밀리고 흘러서 金官國의 해변에 닿았다. 사람들이 괴이하게 생각하여 건져내지 않으니, 궤는 또 밀리고 옮겨져서 辰韓 땅 아진포(阿珍浦)에 와서 닿으매 늙은 할미가 건져서 궤를 열어본즉 뜻밖에도 어린아이가 있어 거두어 기르다.

장성함에 미쳐 신장이 九尺이나 되고, 풍채가 밝고 정신이 총명하여 지혜와 학식이 사람에서 지나더라. 궤가 처음 와서 닿았을 때 까치가 따라오며 우는지라. 鵲字에서 鳥字를 생략하고 昔字로 성씨를 삼고 궤를 헤쳐 나왔다하여 名을 脫解라 하다. 처음에는 물고기나 잡고 낚시로 업을 삼아 노구를 봉양하는데 조금도 게으른 빛이 없이 잘하므로 노구가 이르기를 너는 학문에 힘써서 공명을 세우도록 하라 하니 드디어 학문에 정신을 차려 전력을 하여 지리도 통달이 되다.

楊山 아래 포공(匏公, 일본인으로 신라에 귀화하여 벼슬을 하고 있었음)의 집을 바라보니 길지임을 알고 궤계(詭計, 속이는 계교)를 써서 사다. 남해왕이 석탈해의 어질다 함을 듣고 그 딸로서 아내를 삼게 하다. 남해왕이 훙(薨)할 시기에 유리와 사위인 탈해에게 말하되 나 죽은 후에 너희 朴∙昔 二姓이 연장자로 써 왕위를 이으라 하다. 유리왕이 훙(薨)함에 있어 탈해에게 이르기를 몸이 국위(國威)으로 연결되어 있으며 자위가 대신으로 여러 차례 공을 세웠고, 또 선왕의 명령이니 나 죽은 후에 왕위에 나가게 하라 하여 후한광무제 건무중원이년정사(57)에 즉위하니 年이 육십이세로서 재위 이십사년에 薨하니 도성 북쪽 壤井丘(양정구)에 안장하다.

삼국유사에 이르되 탈해가 居地로 可한 곳은 匏公의 집이라 하여 詭計를 생각하여 가만히 숯돌과 숯을 匏公의 집에 묻어두고 얼마간 지나서 匏公에 이르기를 이땅은 우리 선대의 家基라 하니 匏公이 무슨 증거가 있느냐 한즉 탈해의 말이 우리 선조는 치장(治匠, 대장장이)으로서 잠시 타향에 이주하였던 바 이제 匏公이 차지하였으니 돌려 달라 하며 숯돌과 숯을 캐내어 보이고 드디어 그 집을 취하여 살았다 한다.

➃ 김씨 왕조 수립

김알지 탄생설화는 『삼국유사』 기이(紀異) 제2 김알지 탈해왕대조(金閼智脫解王代條)와 『삼국사기』신라본기 탈해이사금조(脫解尼師今條)에 수록되어 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내용은 다음과 같다.

탈해왕 9년 3월에 왕이 밤중에 금성(金城) 서쪽 시림(始林) 숲속에서 닭이 우는 소리를 듣고, 날이 밝자 호공(瓠公)을 보내어 이를 살펴보도록 하였다. 호공이 시림에 다다라 보니, 금빛의 작은 궤짝이 나뭇가지에 달려 있고 흰 닭이 그 아래서 울고 있었다.

이 사실을 듣고 왕은 궤짝을 가져오게 하여 열어 보니 조그마한 사내아이가 그 속에 들어 있었는데, 용모가 기이하게 뛰어났다. 왕은 기뻐하며 하늘이 그에게 아들을 내려보낸 것이라 하여 거두어 길렀으니, 그 아이는 자라감에 따라 총명하고 지략이 뛰어나서 그 이름을 알지라 하였다.

또, 금빛 궤짝에서 나옴을 연유로 하여 성을 김씨라 부르고, 처음 발견되었던 장소인 시림을 고쳐 계림(鷄林)이라 이름하고, 이로써 국호를 삼았다.

한편, 『삼국유사』에는 이와는 상당히 다른 내용이 많이 담겨 있다. 즉, 왕이 직접 닭 우는 소리를 들은 것이 아니라

영평(永平 : 後漢 明帝의 연호) 3년 경신(庚申) 8월 4일에 호공이 밤에 월성(月城) 서리(西里)를 지나다가 큰 빛[大光明]이 시림 속에 비침을 보았다. 붉은 구름[紫雲]이 하늘로부터 땅으로 뻗쳤는데, 구름 한가운데 황금 궤짝이 나무 끝에 걸려 있었고, 빛은 그 궤로부터 흘러나오고 있었다. 또한, 흰 닭[白鷄]이 그 나무 밑에서 울고 있었다.

왕에게 이를 아룀에 왕은 그 숲으로 가서 궤를 열어 보니 어린 남자[童男] 하나가 누워 있다가 곧 일어났다. 이는 마치 박혁거세의 옛일과 같으므로 그 말에 인하여 알지라 이름을 지으니, 알지는 곧 우리말의 어린애를 뜻한다. 이 아이를 안고 대궐로 돌아오니 뭇새와 짐승들이 서로 따르고 기뻐하여 모두 뛰어놀았다.

왕은 알지를 태자로 책봉하였으나 뒤에 파사(婆娑)에게 사양하여 왕위에 오르지 않았다. 금궤에서 나왔다 하여 성을 김씨라 하였다. 알지는 열한(熱漢)을 낳고, 열한은 아도(阿都)를 낳고, 아도는 수류(首留)를 낳고, 수류는 욱부(郁部)를 낳고, 욱부는 구도(俱道)를 낳고, 구도는 미추(未鄒)를 낳았으며, 이 미추가 왕위에 오르니 신라의 김씨는 알지로부터 시작되었다.

이상이 이 신화의 내용이다. 시조 신화는 일반적으로 신화 주인공의 출생 근원이 어디인가에 따라 두 갈래로 나눌 수 있다. 이는 인간 생명의 강하(降下)로서의 천생관(天生觀)과 인간 생명의 용출(湧出)로서의 지생관(地生觀)에 의거한다. 천생관에 의한 천강시조신화(天降始祖神話)는 다시「동명왕신화」 · 「단군신화」와 같이 신성혼(神聖婚)에 의하여 의신화(擬神化)되는 것과, 「박혁거세신화」 · 「김수로신화」와 같이 알의 형상으로 강천한다는 난생설화와 「김알지신화」처럼 처음부터 인간의 모습으로 강천하는 것으로 나눌 수 있다.

이 시대를 특징짓는 것은 왕호로서의 마립간(麻立干) 칭호이다. 이전까지 사용해온 거서간(居西干) · 차차웅(次次雄) · 이사금(尼師今) 등의 왕호는 계승자 이상의 권력자의 의미를 풍기지 못하였다. 그런데 내물마립간(356∼401) 때부터 사용한 마립간 칭호는 마루 · 고처(高處)의 지배자〔干〕혹은 최고의 지배자라는 의미 그대로 종전에 비해 훨씬 강화된 권력자의 느낌을 준다. 그러니까 성읍국가의 지배자인 간(干)들을 거느리면서 그 뒤에 군림하는 군왕으로서의 위상이 엿보인다. 따라서 이 연맹왕국 시대는 왕호를 따서 ‘마립간시대’라고도 일컬어지고 있다.

이 시대에 들어오면 종래의 박 · 석 · 김 3성에 의한 교립현상이 없어지고 김씨가 왕위를 독점 세습하였다. 특히 5세기 중에는 왕위의 부자상속제도가 확립되어 왕위 계승을 둘러싼 분쟁을 예방하였다. 이는 그만큼 왕권이 안정되었음을 뜻하는 것이다.

왕에 대한 칭호를 거서간, 차차웅, 이사금, 마립간 등의 신라고유어에서 중국식의 “왕”으로 바꿨다. 또한 신라의 국호(國號)는 신로(新盧) · 시라(斯羅) · 서나(徐那:徐羅我(서라벌)) · 서야(徐耶:徐耶我) · 서라(徐羅) · 서벌(徐我)등으로 불렸으나 지증 마립간 4년 503년 한자 국호를 “신라”로 하였으며 이는 『삼국사기』4권 <智證 麻立干> 편에 수록되어 있으며 내용은 다음과 같다.

4년 겨울 10월에 여러 신하가 아뢰기를

“시조께서 나라를 창업하신 이래로 국호가 정해지지 않았거나, 혹은 ‘사라'(斯羅)’라 일컫고, 혹은 ‘사로'(斯盧)라 일컬었으며, 혹은 ‘신라'(新羅)라고도 하였습니다. 저희들은 ‘신’이라는 글자는 덕업이 날로 새로워진다는 뜻이고, ‘나’라는 글자는 사방을 망라한다는 뜻으로 생각해온즉, 이를 나라 이름으로 삼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또 예로부터 나라를 가진 이들을 보면 모두 ‘제'(帝)나 ‘왕'(王)을 일컬었습니다. 우리 시조께서 나라를 세워 지금에 이르기까지 22세 동안 단지 방언으로만 왕호를 일컫고 존귀한 칭호를 바로잡지 못했습니다. 이제 여러 신하가 한 뜻으로 삼가 ‘신라 국왕’이라는 칭호를 올리나이다”

라고 하니 왕이 그대로 쫓았다.

新羅金氏誕降事跡(신라김씨탄강사적)

탈해왕 9년(西紀 六五年) 봄 3월에 왕이 밤에 금성 서쪽의 시림(始林)의 숲에서  닭  우는 소리를 들었다. 날이 새기를 기다려 호공을 보내어 살펴보게 하였더니, 금빛이 나는 조그만 궤짝이 나뭇가지에 걸려 있고 흰 닭이 그 아래에서 울고 있었다. 호공이 돌아와서 아뢰자, 사람을 시켜 궤짝을 가져와 열어 보았더니 조그만 사내아기가 그 속에 있었는데, 자태와 용모가 기이하고 컸다. 왕이 기뻐하며 좌우의 신하들에게 말하기를

“이는 어찌 하늘이 나에게 귀한 아들을 준 것이 아니겠는가?”

하고는 거두어서 길렀다. 성장하자 총명하고 지략이 많았다. 이에 이름을 알지(閼智)라 하고, 금궤짝으로부터 나왔기 때문에 성을 김(金)이라 하였으며, 시림을 바꾸어 계림(鷄林)이라 이름하고 그것을 나라 이름으로 삼았다.

(해설 1)

영평(永平) 3년 경신(庚申)【중원(中元) 6년이라고도 하나 잘못이다. 중원은 2년 뿐이다】 8월 4일에 호공(瓠公)이 밤에 월성(月城) 서리(西里)를 걸어가는데, 크고 밝은 빛이 시림(始林)【구림(鳩林)이라고도 한다.】속에서 비치는 것이 보였다.

자줏빛 구름이 하늘로부터 땅에 뻗쳤는데 그 구름 속에  황금(黃金)의 궤가 나뭇가지에 걸려 있고, 그 빛은 궤 속에서 나오고 있었다. 또 흰 닭이 나무 밑에서 울고 있었다. 이 모양을 호공은 왕에게 아뢰었다. 왕이 그 숲에 가서 궤를 열어보니 동남(童男)이 있는데 누웠다가 곧 일어났다. 이것은 마치 혁거세(赫居世)의 고사(故事)와도 같았으므로 그 말에 따라 그 아이를 알지(閼知)라고 이름지었다.

알지란 곧 우리말로 소아(小兒)를 일컫는 것이다. 그 아이를 안고 대궐로 돌아오니 새와 짐승들이 서로 따르면서 기뻐하여 뛰놀고 춤을 췄다. 왕은 길일(吉日)을 가려 그를 태자로 책봉했다. 그는 뒤에 태자의 자리를 파사왕(破娑王)에게 물려 주고 왕위에 오르지 않았다.

금궤(金櫃)에서 나왔다 하여 성(姓)을 김씨(金氏)라 했다. 알지는 열한(熱漢)을 낳고 열한은 아도(阿都)를 낳고, 아도는 수류(首留)를 낳고, 수류는 욱부(郁部)를 낳고, 욱부는 구도(俱道; 혹은 구도仇刀)를 낳고, 구도는 미추(未(味)鄒)를 낳으니 미추(未鄒)가 왕위에 올랐다. 이리하여 신라의 김씨(金氏)는 알지에서 시작된 것이다

(해설 2)

입양의식은 호공이 주관이 되어 사로의 시림(始林)에서 성대하게 가졌다. 그 의식에서 하늘의 매개로는 상서로운 흰 닭을 세웠다. 경상도 지방의 경사로운 전통 혼례에서는 혼례상에 닭을 놓고 하늘에 혼약한다.

의식에는 성(星)을 금궤에 담아 하늘 높이 큰 나무 끝에 메달아 놓고 자색 천으로 주변에 구름과 같이 휘장을 둘렀다. 의식은 장엄하게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하늘로부터 궤를 내려 왕이 뚜껑을 여니 성(星)이 누어 있다 일어나서 걸어 나와 석탈해왕을 알현하자 왕은 기뻐하며 성씨를 묻고 본관을 물어보니 성(姓)은 金(짐)이고 본관은 알티(알타이)라고 대답했다.

이것 저것 물어보니 나이답지 않게 아는 것이 많아 금궤에 나왔다 하여 金氏로 사성(賜姓)하고 그의 본관 음을 가져와 알티를 아는 것이 많고 지혜롭다는 뜻으로 閼智(알지)라 이름 짓고 태자로 삼았다.

황금으로 장식한 마차에 태워 숲에서 나와 왕궁으로 들어가는 연도에 축제 행사가 이어졌다. 왕권이 강화되었음을 과시하기 위해 문무백관들과 왕족 ,귀족들을 초청해 경사스러운 잔치를 벌이고 뭇 새와 짐승들을 종이와 천으로 만들어 궁으로 행진한 연등놀이를 설화로 기록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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