古朝鮮(고조선)

고조선(古朝鮮, BC2333~BC108))은  한국의 역사상 최초의 고대 국가이다.

고조선의 건국은  일연이 쓴 삼국유사에 한국에서는 최초로 등장한다. 김부식의 삼국사기(三國史記)와 일연의 삼국유사 외에는 고대사에 대한 기록이 거의 없어, 한국 고대사에서 정확한 실상을 파악하기란 대단히 어렵다. 문헌상의 기록에 따라 실존했던 국가라는 사실은 분명하지만 관련 기록이 적고 추상적이고 모호하며 직접적으로 고조선의 것이라 암시되는 유물·유적이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에 고조선의 연대와 강역·역사·문화 등에 대해서는 많은 논란이 있다. 

역사적 실체로서 등장한 고조선은 삼국사기에서는 고조선(단군조선,기자조선)과 위만조선(衛滿朝鮮)으로 구분하고 있으며, 『제왕운기(帝王韻紀)』에서는 단군에 의한 조선을 전조선(前朝鮮), 기자에 의한 조선을 후조선(後朝鮮)이라 하고 위만 조선을 후속시켜 고조선을 삼조선(三朝鮮)으로 나누고 있다.

조선 초기 고조선에 대한 이해는 三國遺事와 帝王韻紀의 출현 이후 정리된 고려 후기의 인식론을 계승 발전시킨 것이다. 그 핵심은 단군조선, 기자조선, 위만조선의 三朝鮮 인식이다. 이것은 삼국유사의 고조선[왕검조선]․ 魏滿朝鮮, 제왕운기의 전조선, 후조선, 위만조선의 인식론을 구체화한 것이다. 따라서 고조선에 대한 조선 초기의 인식론은 기본적으로 제왕운기의 그것을 계승하고 있다. 전조선을 단군조선으로, 후조선을 기자조선으로 대체하여 역사적 위상을 보다 분명하게 이해하려는 결과였다고 보인다. 이는 일제 강점기 전까지 이 기조는 유지된다.


삼조선 인식은 이후 한국사 체계의 토대를 마련하였다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 물론 이후 여러 양상의 인식론이 나타나고, 단군조선에 대한 이해의 확장으로 단군의 고조선 건국만을 고조선의 범주로 이해 하고자 하는 경향도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기초는 삼조선 인식체계에서 있었다[5].

① 檀君朝鮮(단군조선)

삼국유사에 실려 있는 단군신화는 그 내용이<魏書>와<古記>라는 데에서 인용하고 있음을 밝히고 그 내용을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위서(魏書)에 이르기를 지금으로부터 2000년 전에 단군왕검(壇君王儉)이 있었다. 아사달(阿斯達)에 도읍을 정하고 새로 나라를 세워 나라 이름을 조선이라 하였는데 이는 요(堯)임금과 같은 시대이다. (三國遺事권 1, 紀異 2, 古朝鮮).

삼국유사에서 인용하고 있는<위서>라는 책은 중국의 삼국시대에 존재한 위(魏)에 관한 역사책으로서 위나라 때부터 2000년 전이라는 연대를 감안할 때, 적어도 기원전 1700∼1800년 전으로 단군의 존재시기를 설정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단군을 중국의 전설적인 왕인 요임금과 같은 시대라고 함으로써 그 연대의 사실성을 강조하고 있다. 즉 이 기록에서는 요임금의 존재시기를 전제로 하여 단군왕검을 부각시켰고, 지리적 위치로서 아사달이라는 구체적 지명까지 언급하고 있다.

단군조선의 실상에 관해서는 여러 측면에서 검토될 수 있으나, 그 역사적 성격을 고고학적 시기 구분과 연결시키면 우리나라의 신석기문화 및 일부 청동기문화와 관련됨을 볼 수 있다. 따라서 단군조선의 성격은 국가 형성과는 직접적인 관계가 없는 사회이며, 우리 민족사에 최초로 등장하는 역사적 존재로서의 의의가 크다[6].

檀君 神話(단군신화)

古記에 이르기를 옛날 환인(桓因)의 서자(庶子) 환웅(桓雄)이 자주 천하에 뜻이 있어 인간 세상을 지망하였다. 그 아버지가 아들의 뜻을 알고 아래로 삼위(三危) 태백땅을 내려다보니 널리 인간들에게 큰 이익을 줄만하였다.

이에 천부인(天符印) 세 개를 주어가서 다스리게 하였다. 환웅이 무리 三千을 이끌고 태백산 꼭대기에 있는 신단수(神壇樹) 아래로 내려와 그 곳을 神市라 하였으니 이가 바로 환웅천왕이다. 그는 풍백(風伯)과 우사(雨師)와 운사(雲師)를 거느리고 곡식과 생명과 질병과 형벌과 선악을 주관하고 인간의 360여 가지 일을 주관하여 세상에 살면서 교화를 베풀었다.

이 때에 곰 한 마리와 호랑이 한 마리가 같은 동굴에서 살고 있었는데 항상 신웅(神雄)에게 기도하여 사람되기를 원하였다. 이 때 신웅이 신령스러운 쑥 한줌과 마늘 20개를 주며 말하기를 “너희들이 이것을 먹고 햇빛을 백일 동안 보지 않으면 곧 사람이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곰과 호랑이는 이것을 얻어먹고 21일 동안 삼가니 곰은 여자의 몸으로 변했으나 호랑이는 능히 삼키지 못해 사람이 되지 못하였다. 웅녀는 혼인해서 같이 살 사람이 없으므로 날마다 신단수 아래에서 아기 갖기를 빌었다. 환웅이 잠시 변하여 혼인하였더니 이내 잉태해서 아들을 낳았으니 이름을 壇君王儉(단군왕검)이라 하였다. 그는 요임금이 즉위한 50년 庚寅年에 평양성에 도읍하고 비로소 조선이라 일컬었다[7].

➁ 箕子朝鮮(기자조선)

기자조선(箕子朝鮮)은  고조선의 왕조 중 하나인 고대국가이다. 조선 시대에는 일반적으로 고조선을 셋으로 구분하였는데  기자가 세웠다고 하는 기자조선은 이 중 두 번째 시기에 해당된다.

명칭은  단군조선과 같은 ‘조선’이지만, 구분을 위해 후조선(後朝鮮) 또는 기씨조선(箕氏朝鮮)이라 부르기도 하였다. 기자조선은 실재 여부를 비롯하여 건국 과정, 성격에 대한 인식이 시대에 따라 논란이 있다. 일반적으로 기자조선에 대한 고전적인 인식(기자동래설, 단군조선-기자조선-위만조선의 승계 등)을 부정하고 있다.

단군조선을 계승한 것으로 인식되어온 이른바 기자조선의 출현(서기전 12세기)은 우리 역사에서 청동기문화의 시작과 거의 일치하며, 이는 단군조선에서 기자조선으로의 변화가 단순한 정치적 변화가 아닌 대규모의 문화 · 종족적 변화를 반영한 것임을 보여준다.

기자는 원래 상나라의 왕족으로 상나라가  주 무왕에 의해 멸망하자 조선의 왕이 되었다고 한다. 상나라 멸망 후 기자가 주나라에 복종하기를 거부하고 조선으로 망명하자 주 무왕이 기자를 조선에 봉했다는 기록(상서대전) 이 있고, 반대로 주 무왕이 기자를 조선에 봉해서 기자가 조선으로 와서 왕이 되었다는 상반된 기록(사기)이 함께 존재한다. 기원전 1122년부터  기원전 195년  경까지 존속하였다.

BC 194년에  한나라에서 망명해 온  위만에게 왕위를 찬탈당하였고, 이로써 기자조선은 멸망하였다[7].

➂ 衛滿朝鮮(위만조선)

위만조선(衛滿朝鮮:기원전 194년 ~ 기원전 108년) 또는 위씨조선(衛氏朝鮮)은  고조선의 마지막 왕조로, 기원전 194년 연나라에서 이주한  위만이 고조선의 왕인 준왕의 왕위를 찬탈하고, 국호는 그대로 조선으로 한 뒤  왕검성에 도읍하여 건국되었다.

위만조선은 대체로 중국계 유민과 토착민이 연합된 국가로 여겨진다. 이들은 철기 문화를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주변 지역을 활발히 정복하였고, 중계 무역으로 막대한 이익을 취했다. 위만조선의 세력이 성장하면서  진국과 한나라의 교역로를 가로막게 되었고, 이에  전한  무제가  기원전 109년  사신 섭하가 고조선 군에 살해된 것을 빌미로 대대적으로 침공하였다.

한나라와의 1년간의 전쟁 끝에 내분이 발생, 위만의 손자이자 고조선의 마지막 왕인 우거왕이 살해되고, 성기가 주살당하면서  왕검성이 함락되어  기원전 108년  멸망하고 한사군이 설치되었다. 또한 건국자인 위만의 국적이나 지배세력과 이주민, 유민과의 관계와 통치방법에 대해서도 이견이 있다[8].

식민사관을 해결할 司馬遷史記(사마천사기)의 朝鮮列傳(조선열전)

다음 글은 사마천 사기 전문가 김영수 한국 사마천학회 이사장의 사마천 사기 권 115. 조선 열전 강의 내용을 발췌 정리한 것이다. 여기서 그는 조선 열전을 재해석하여 중국의 동북공정에 대한 경각심과 일본에 의하여 저질러진 역사 왜곡의 실상 식민 사관을 극복할 단초를 제시하고 있다.

안타깝게도 사마천 사기의 조선 열전은 고조선 멸망사이다. 고조선은 기원전 108년에 한나라의 침공으로 멸망한다. 기원전 108년은 사마천의 나이 38세로 생생한 당대 사 이며 1차 시료이다. 사기에서 고조선은 11세기 기자조선부터 출발한다. <기자가 조선으로 갔다>에서 기자조선 이전에 이미 조선의 존재를 인정하고 있다.

조선 열전 마지막 부분에서 태사공(사마천)이 말하기를 “우거는 (왕검성의) 견고함에 힘입어 (저항하였으나) 나라는 이에 사직(社稷)이 끊어지고, 섭하는 공(功)을 세운 것처럼 속여 군사를 내는 시초가 되었다. 선 장군의 편협함은 잘못을 떠나기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다. 번우(番禺)를 잃고 뉘우치는데도, 오히려 의심을 받았다. 순체는 공로(功勞)를 다투다가 공손수와 함께 모두 주살되었다. 양군(兩軍)이 함께 치욕을 입으니, (그들의 부하) 장수들도누 제후(諸侯)가 되지 못했다.”

한무제는 순체와 양복을 장수로 삼아  수만 명의 수륙 양군을 동원하여 조선을 공격하였지만 함락을 시키지 못하고 크게 패하였다. 왕검성을 함락 시키기 위해 위산과 제남 태수 공손수를 보냈지만  별 소득이 업자 모두 사형에 처하였다. 지루하게 계속되던 대치는 왕검성에 내부 반란이 일어나  반란세력들이 우거왕과 끝까지 저항을 하던 성기(成己)를 죽이고  한나라에 항복을 하면서 끝을 맺는다. 우거왕과 성기를 죽인 재상(반란세려)들은 봉토를 받고 제후에 임명되는데 반해, 조선정벌에 나섰던 한나라의 장수 순체는 기시(棄市, 사람들이 많이 모인 곳에서 죄인의 목을 베고 그 시체를 길거리에 버리던 형벌)에 처하였으며, 양복은 서인으로 강등 시켰다. 한나라가 승리하였다면 장수들이 그 공으로 제후가 되거나 큰 상을 내렸을 것이다. 이는 한나라가 전투에서는 승리 하였지만 전쟁에서는 실패한 전쟁이다,

누선 장군의 편협함은 잘못을 떠나기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다. 번우(番禺)를 잃고 뉘우치는데도, 오히려 의심을 받았다. 순체는 공로(功勞)를 다투다가 공손수와 함께 모두 주살되었다. 양군(兩軍)이 함께 치욕을 입으니, (그들의 부하) 장수들도 제후(諸侯)가 되지 못했다.”

한무제는 순체와 양복을 장수로 삼아  수만 명의 수륙 양군을 동원하여 조선을 공격하였지만 함락을 시키지 못하고 크게 패하였다. 왕검성을 함락 시키기 위해 위산과 제남 태수 공손수를 보냈지만  별 소득이 업자 모두 사형에 처하였다. 지루하게 계속되던 대치는 왕검성에 내부 반란이 일어나  반란세력들이 우거왕과 끝까지 저항을 하던 성기(成己)를 죽이고  한나라에 항복을 하면서 끝을 맺는다.

우거왕과 성기를 죽인 재상(반란세려)들은 봉토를 받고 제후에 임명되는데 반해, 조선 정벌에 나섰던 한나라의 장수 순체는 기시(棄市, 사람들이 많이 모인 곳에서 죄인의 목을 베고 그 시체를 길거리에 버리던 형벌)에 처하였으며, 양복은 서인으로 강등 시켰다. 한나라가 승리하였다면 장수들이 그 공으로 제후가 되거나 큰 상을 내렸을 것이다. 이는 한나라가 전투에서는 승리 했지만 전쟁에서는 실패한 전쟁이다.

사마천의 <사기>에는 “마침내 조선을 평정하고 4군으로 삼았다 (遂定朝鮮為 四郡)”만 기록되어 있고 4군의 이름이나 위치 기록은 없다. 이는 한나라의 통치력이 미치지 못함을 보여준다.


식민사관(植民史觀)은  기자조선을 부정하고 사기의 마지막 부분을 왜곡 한다. 한사군의 위치를 대륙을 제외하고 반도 이남으로 한정하였다.(반도사관) 또한 4세기 이전의 한국의 상고사도 부정하고 있다. 일본은 사마천의 사기의 조선열전의 고조선 멸망사를 통하여 고조선 멸망사는 일제강점기  일제의 한국 식민 지배를 정당화하는데 호재로 활용,  한민족을 역사적으로 다른 나라에 지배되어 왔고 자립 능력이 없는 정체된  민족으로 부각시켜 일본의 한일 합방을 정당화하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그러나 사마천의 <사기>는 중국의 동북공정 논리에서 출발했지만 삼국사기에 비해 1,000년 앞서 고조선의 실체를 최초로 인정한 사료적 가치가 크며, 더 나아가 <사기> 조선 열전을 통하여 일본의 식민지 지배 논리에 의해 만들어진 식민 사관을 극복하고, 올바른 역사 바로 세우기로 나아 감이 절실하다고 주장하고 있다[9,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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