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序論 

족보(族譜)란 부계(父系)를 중심으로 혈연(血緣) 관계를 도표식으로 나타낸 한종족의 계보(系譜)로 일명 보첩(譜牒), 세보(世譜) 라고도 한다. 족보는 우리 한국만이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고 문화 민족이면 다 가지고 있다. 중국과 일본은 물론 서구의 영국, 프랑스, 독일을 위시하여 미국과 같이 여러 종족이 모인 나라에서도 족보를 가지고 있다.

  우리나라의 족보는 고려 때 부터라고 알려져 있다. 왕실(王室)의 계통을 기록 한데서부터 시작 되었다.고려 중엽 이후로서 김관의(金寬毅)의 왕대실록(王代實錄)  임경숙(任景肅)의  선원록(璿原錄)이 그 효시라 한다. 고려 문종 때 성씨가 없는 사람은 과거에 응시 못하게 했으므로 이때부터 일반에게 성씨가 생겨난 것으로 추정된다. 족보가 나오기전에는 가첩(家牒)이나 가승(家乘) 형태로 이어지다가 우리 민간에서 족보다운 체계를 세운 것은 조선 명종(明宗) 1562년 문하유씨(文化柳氏)의 가정보(嘉靖譜)이다. 이 가정보(嘉靖譜)는 족보의 표본(標本)이 되며 다른 문벌(門閥)들의 족보를 편찬하는데 좋은 모형(模型)과 참고가 되여 왔다. 이후 임진왜란 때  전화(戰火)로 사회가 혼란했고 많은 문헌(文獻)이 불타고 분실 되었다. 그러다가 조선 숙종(肅宗) 이후 활성화 된다. 이는 족보가 없으면 상민(常民)으로 취급되어 사회적 차별이 있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뇌물을 써가며 족보에 끼어 들기도 했다. 이러한 일들은 족보로 인한  사회적 부작용 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와 같은 부작용이 있다 하더라도,  족보는 문벌(門閥)과 가계(家系)를 분명히 하고 가계(家系)의 역사(歷史)를 기록 하는데 필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우리는 이른바 가문(家門)이 좋다는 명문(名門) 집을 볼 때 모두가 가계(家系)가 뚜렷했고 가풍(家風)이 잡혀 있음을 본다. 무엇보다도 조상을 올바르게 인식 한다는 것은 자손의 도리며  수신제가(修身齊家)의  하나일 것이다.

  족보는 남성 중심과 여성 희생 이라는 부정적인 측면 에도 불구하고 족보에 대한 해박한 지식이 있든 없든 우리 민족의 정서(情緖)에 깊숙이 자리 잡아  대(代)를 이어야 한다는 생각은 곧 다산(多産)으로 이어져 오늘의 한국 사회의 근간(根幹)을 이루는데 기여 했다는 것은 부정 할 수 없는 사실이다.

  오늘 날 여성의 사회 진출로 인한 여권(女權) 의 신장(伸張), 핵가족화(核家族化) 와 함께 젊은 세대의 족보에 대한 관심 결여는 출산율(出産率)저하라는 국가적 문제로 연결 짓는 시각이 지나친 비약이 아니길 바란다.

 이에 젊은 세대에 좀 더 다가갈 수 있는 족보해설집(族譜解說集)을 발간(發刊)하니 족보에 대한 관심과 이해하는데 보탬이 되었으면 한다.

그림 1. 경주김씨 태사공파 대동보
①甲辰譜 太師公派 最古譜, 정조8년(1784년)版 重刊, ②丁酉譜/司丞公派 世譜 (1957년),
③丙辰譜(1976년), ④己卯譜(1999년)
그림 2.
 ①甲寅譜 慶州金氏世譜(1914年)②新羅 三姓淵源譜, (1642년)판
그림 3.
①汎金氏略史  
②太師公派系統圖
③新羅金氏大宗史

2. 사승공파 소개(司丞公派 紹介)

1) 신라김씨 약사(新羅金氏略史)

신라김씨는 신라 천년 사직을 이어온 삼성(박·석·김)중의 하나다. 한국 제1위의 성씨 인구를 가진 김씨는 거의 모두가 가락국(駕洛國) 수로왕(首露王)을 시조로 하는 가야계 김씨와 신라의 알지(閼智)를 시조로 하는 신라계 김씨의 어느 한쪽에 연원을 두고 있다.

2015년 통계청 성씨별 조사에 따르면 우리나라에서 현존 약 532 성씨 중에서 김씨는 전체 인구의 21.5 %인 1,068만 명으로 인구수가 제1위를 차지하고 뒤를 이어 이(李)씨는 14.7%로 730만 명, 박(朴)씨는 8.4% 419만 명, 최(崔)씨는 4.7% 233만 명, 정(鄭)씨 4.3% 215만 명이다,

김씨의 본관별 인구수를 보면 김해김씨가 445만 6천 명으로 가장 많고, 경주김씨가 180만 명, 광산김씨가 92만 6천 명, 김녕김씨가 57만 7천 명, 안동김씨가 51만 9천 명이다. 그 외에도 의성김씨 28만 7천 명, 강릉김씨 17만 9천 명, 선산김씨 13만 8천 명 순이다.

김씨의 본관은《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에는 499본,《성씨대관(姓氏大觀)》에는 600본,《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에는 문헌상 623본이나 나타나 있으나, 이 중 시조가 뚜렷한 것은 100본 미만이다. 2010년 신라김씨 총연합대종원에서 발표한 바에 따르면, 신라김씨 본관은 총 356본(신라계 179본, 경순왕계 177본)으로 인구는 610여만 명이고, 가야계(수로왕계) 김씨는 6본 470여만 명이다.

가야계는 제1의 성씨 인구를 가진 김해김씨(450만명) 중심의 비교적 단일계로 번창한 반면 신라계는 신라, 고려, 조선 시대를 거치면서 여러 관향(貫鄕)으로 분종(分宗)되고 파계(派系)도 복잡하지만, 주종(主宗)은 경주김씨(180만명)이다.

이는 우리나라에서 씨족의 신분을 상징하는 것으로 성씨보다 본관을 더 중요시한다. 그 이유는 인구 구성에 비해 몇 개의 성씨가 많은 수를 차지하고 있고, 한 성씨 내에서도 여러 갈래의 씨족이 분포하다 보니, 성씨 만으로 신분을 구분하는 것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본관은 한국 성씨 제도의 특징일 뿐 아니라, 신분 질서의 핵심적 역할을 해왔으며, 한국인 뿌리 의식의 기본이 되고 있다.

2) 경주김씨약사(慶州金氏略史)

(1) 경순왕의 후예 (敬順王의 後裔)

慶州金氏는 알지계통(閼智系統)의 金氏 중에서도 가장 많은 인구를 가진 血族으로 출발점은 신라 마지막 임금인 경순왕이 고려에 손국(遜國) 이후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 같다.

정조 8년(1784년) 계림군파의 우의정 김사목(金思穆)이 송악산 언덕에서 발견한 三面의 지석(誌石)은 경순왕의 가계를 고증하는데 주요한 근기(根基)가 되고 있다.

경순왕에게는 아들 9명이 있었는데, 첫째부인 죽방부인박씨 (竹房夫人朴氏) 와의 사이에서 첫째 일(鎰 : 마의태자), 둘째 굉(鍠), 세째 명종 (鳴鐘 : 永芬公)을 두었고, 낙랑공주(樂浪公主)의 사이에서 네째 은열(殷說 : 大安君), 다섯째 석(錫), 여섯째 鍵(건), 일곱째 선(銑), 여덟째 추(錘)를 두었고, 별빈안씨(別嬪安氏)와의 사이에서 아홉째 덕지(德摯)를 두었다.

대보공 알지(閼智)의 후예로 파악되는 인구는 356 본관에 총 610만여 명이며, 이중 경순왕의 후예로 파악되는 인구는 177 본관에 총 440만여 명으로 약 72.5% 정도로 파악된다. 이를 계별로 살펴보면 대안군계 68본관에 206만여 명, 영분공계가 20본관에 72만여 명, 태자파가 3본관에 69만여 명, 기타 의성김씨 등 86본관에 93만여 명으로 추정된다.

(2) 경주김씨

경주김씨의 대표적인 파로는 경순왕의 셋째아들 김명종(金鳴鍾)을 시조로 하는 영분공파와 넷째아들 김은열(金殷說)을 시조로 하는 대안군파, 경순왕의 후예이지만 중간 세계가 실전(失傳)되어 대안군의 후예로 남아있던 김순웅(金順雄)을 시조로 하는 대장군파(2008년 태자파 창시)), 대안군의 후손인 김인관(金仁琯)을 시조로 하는 태사공파, 같은 김은열의 후손인 김장유(金將有)를 시조로 하는 판도판서공파 등 5개 파가 주종을 이룬다.

○ 영분공파

영분공파조(永芬公派祖)인 명종(鳴鐘)은 경순왕의 셋째 왕자로 경순왕(敬順王)이 손국(遜國)한 후 고려조(高麗朝)에서 경주군(慶州君)에 봉해졌다. 그의 6世孫 김예겸(金禮謙)은 삼한벽상공신으로 내중령(內中令)을 지냈고, 그의 8세손 김의진(金義珍)은 유학(儒學)의 종주(宗主)로 평장사(平章事)를 역임했고, 또한 12세손 김인경(金仁鏡)은 문무(文武)를 겸비한 고려의 명신(名臣)으로 조충과 함께 강동성에서 거란군 평정에 공을 세우고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에 올라 시(詩)와 글씨로 명성을 떨쳤다. 公의 16世孫에서 두계공파, 수은공파, 밀직공파로, 18世孫에서 월성부원군파 등 10여 개 소파로에서 분파되었다[27].

○ 대안군파 (大安君派)

대안군파조(大安君派祖)인 은열(殷說)은 경순왕의 네째 왕자로 고려조(高麗朝)에서 공부시랑을 거쳐 보국대안군(輔國大安君)에 봉해졌다.

은열공을 그 선조로 하는 대안군파는 경주김씨의 대표적인 가문으로 6세손 태사공 김인관(金仁琯)을 시조로 태사공파/차남계 와 11세손 판도판서공 김장유(金將有)를 시조로 하고있는 판도판서공파/장남계, 고려의 대장군 김순웅(金順雄)을 시조로 하고 그의 13세손 계림군 김균(金梱)을 중시조로 하는 계림군파(태자파 창시) 등 3개 파가 대표적이며 또한 후손들은 경주김씨뿐만 아니라 (구)안동김씨, 김녕김씨, 수원김씨등 여러 본관(本貫)으로 나뉘어졌다[27].

태사공파의 파조인 김인관은 고려 예종 때 검교태자태사(檢校太子太師)에 올랐다. 그의 9세손 김자수(金自粹)는 태사공파의 중심인물로 고려말 좌상시(左常侍)로 있다가 고려가 망하자 안동에 은둔하였다. 특히 김자수의 8세손으로 황해도 관찰사를 지낸 김홍욱 이후로 많은 인물이 배출되었는데, 8명의 정승과 1명의 왕비가 나왔다. 특히 부마가 된 김한신(金漢藎·영조의 딸 화순옹주의 남편)의 양자로 들어간 김이주의 손자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가 유명하다.

또한, 대안군의 8세손 김봉모(金鳳毛)는 외국어에 능통하여 외국 사신을 접객하는 관반사(館伴使)를 맡아보았으며, 아들 김태서(金台瑞 : 전주김씨의 시조)는 고종 때 한림학사를 거쳐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에 이르렀고, 그의 아들 김약선(공부시랑)·기손(평장사)·경손(추밀원부사) 3형제가 유명하다. 판도판서공파 파조인 김장유는 충북 보은에서 은거하여 생을 마쳤는데, 그 후손으로 김효정(金孝貞·정랑)의 아들인 김정(金淨)은 조광조와 더불어 혁신정치를 시도하다가 기묘사화로 인해 제주도에 귀양을 갔다가 36세에 사사되었다.

○ 대장군파 / 경주김씨 태자파

경주김씨 태자파는 당초 대장군공파라는 이름으로 순웅(順雄) 대장군을 중시조로 삼고 있던 문중으로 은열공의 나이가 순웅 장군보다 오히려 3~4살 어린 점 등을 이상하게 여겨 2000년부터 진짜 뿌리 찾기에 나선 결과 순웅 장군이 마의태자의 둘째 아들이라는 사실을 밝혀냈다. 2009년 9월에는 대종회 명칭도 대장군공파에서 태자파로 바꿨다[37].

고려의 대장군 김순웅(金順雄)은 고려 초에 상장군을 거쳐 대장군을 역임하였다. 대장군공파의 파조이다. 그의 9세손인 김남기(金南基) 가문(봉익대부공파)이 번창하였다. 장군공파의 후손으로 13세손 김균(金稛)이 조선 개국공신으로 보국숭록좌찬성에 이르고 계림군에 봉해지면서 계림군파의 중시조가 되었다. 김균의 손자인 김인민(金仁民)의 판윤공파, 김종순(金從舜)의 공호공파의 가문이 번창하였다.

조선전기의 좌찬성 김균(金梱)의 후손에서만 정승 3명과 많은 판서급 인물이 배출되었다. 좌의정 김명원(金命元), 판서 김남중(金南重), 숙종계비 인원왕후의 부친 김주신(金柱臣), 좌의정 김사목(金思穆), 판서 대제학 김창희(金昌熙), 고종 때의 유명한 총리대신 김홍집(金弘集) 등이 모두 후손이다[21].

(3) 대안군파 약사 (大安君派 略史)

대안군파조(大安君派祖)인 은열(殷說)은 경순왕의 내째 왕자로 고려조에서 공부시랑을 거쳐 보국대안군(輔國大安君)에 봉해졌다. 대안군은 아들 세 명을 두었는데 첫째 아들 문하시중 김태화(金泰華), 대안군의 둘째 아들 공부시랑 김숙승(金叔承), 셋째 아들 김해군(金海君) 김렴(金濂)이다,

대표적인 가문으로 첫째 아들 김태화(金泰華) 系인 김인관(金仁琯)을 시조로 경주김씨 태사공파와 김장유(金將有)를 시조로 하고 있는 판도판서공파가 대표적이며, 둘째 아들인 김숙승(金叔承) 系의 (구)안동김씨, 세째아들 김해군 김렴(金海君 金濂) 系인 김녕김씨, 경주김씨 병판공파, 경주김씨 백촌공파, 경주김씨 익화군파, 수원김씨 등 여러 본관(本貫)으로 갈려졌다[27].

경순왕의 후예로 파악되는 인구는 177 본관에 총 450만여 명이고, 경주김씨(대안군파, 영분공파, 대장군파)는 180만 명이다. 이중 경주김씨 대안군파의 인구는 경주김씨 인구 1/3로 감안하면 60만여 명이며, 대안군의 후예로 156만여 명을 추계하면 68본에 206만여 명이 된다.

① 경주김씨 태사공파 (太師公派 )

대안군의 첫째 아들 문하시중 김태화(金泰華)의 후손으로 公의 첫째 아들 공부원 외랑(工部員外郎) 김정구(金正矩)의 둘째 아들 병마랑중공 김계윤(金繼尹)의 후손들이다.

태사공파는 대안군의 6세손 태사공 김인관(太師公 金仁琯)을 일세조로 계대하는 경주김씨의 최대의 계파로 경주김씨 각 파중 분관(分貫)이 되지 않은 단일계로 번창한 특징이 있다. 고려말의 충신이었던 상촌 김자수에서 비롯한 절의정신(節義精神)을 이어받은 정통적인 사림계(士林系) 가문으로 경주김씨 5파와 10여 개의 지파 중 훌륭한 인재(조선 시대에 6명의 정승과 3명의 왕비 배출)들이 많이 배출된 명문거족(名門巨族)의 가문이다[27]

이와 같이 명문 가문임에도 불구하고 대안군에서 태사공까지 상계 系代가 定立되지 못하고 上系 未詳 或은 誤謬된 系代로서 傳承되어 오는 현실은 痛恨之事로 태사공파 대종회에서는 연구와 고증을 거쳐 1998년 11월 10일 만장일치로 태사공이 대안군의 6世孫 임을 아래와 같이 系代 定立하였다.

태사공파의 파조 김인관(金仁琯)은 대안군의 6세손으로 고려 예종 때 조산대부(朝散大夫)로 위위시경(衛尉寺卿)을 지내고 검교태자태사(檢校太子太師)에 올랐다.

태사공의 9세손 김자수(金自粹)는 고려말 충효대절(忠孝大節)을 겸비한 충신이다. 고려가 망하자 안동에 은거하였는데 태종이 형조판서에 임명했으나 절명사(絶命詞)를 지어놓고 자결(自決)하였다. 이는 성리학과 사림(士林)의 절의정신(節義精神)을 몸소 실천하였으며 이러한 학문이나 정신은 상촌 자신에 의하여 정립하여 후손들에게 계승되었다.

조선 초 상촌 가문이 정치적 명암을 크게 떨치게 된 것은 公의 손자 공평공(恭平公) 김영유(金永濡) 대에 이르러 꽃을 피우게 된다. 공평공은 사헌부 대사헌, 지중추부사, 황해도 관찰사, 공조참판, 형조참판에 지내며 정치 행정 외교 등의 분야에 커다란 공적을 남겼다.

상촌公의 현손이며 기묘명현(己卯名賢)의 한사람인 십청헌(十淸軒) 김세필(金世弼)과 그의 아들 충민공(忠愍公) 김저는 대표적인 사림파 학자이다. 세필(世弼)은 올곧은 선비의 생활로 일관하였으며 기묘사화(己卯士禍)가 일어나자 그는 조광조(趙光祖)를 구원하다가 훈구파의 탄핵으로 유배당해 충주(忠州)의 지비천(知非川) 위에 살면서 호(號)를 지비옹(知非翁)이라 하고 당시 충주목사(忠州牧使) 박 상(朴祥)의 도움으로 학자촌(學者村)을 형성하고 살았는데 선비들이 많이 모여들었다고 하여 그 마을 이름을 부마리(秣馬里)라 불렀다.

세필(世弼)의 아들 충민공은 경연관으로 있을 때 군덕(君德)의 함양을 논하고, 재이(災異) 때 수성(修省)의 도리를 역설하기도 하며, 인재의 등용과 언론의 확충을 진언하기도 하였다. 이때 퇴계 이황은 김저의 학문을 높이 평가하였다. 을사사화(乙巳士禍)에 화를 입고 안동(安東)에 귀양갔다가 함경도(咸鏡道) 삼수(三水)로 옮겨져 이듬해 죽음을 당했다.

조선 후기 상촌공의 손자 중 둘째 손자 좌랑공(佐郞公) 김영원(金永源) 후손으로 상촌공의 8세손인 황해도 관찰사를 지낸 학주(鶴州) 김홍욱(金弘郁) 이후로 많은 인물이 배출되었는데, 8명의 정승과 1명의 왕비가 나왔다. 특히 부마가 된 김한신(金漢藎·영조의 딸 화옹 옹주의 남편)의 양자로 들어간 김이주의 손자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가 유명하다.

② 경주김씨 판도판서공파(版圖判書公派)

대안군의 첫째 아들 문하시중 김태화(金泰華)의 후손으로 公의 처째 아들 공부원외랑(工部員外郎) 김정구(金正矩)의 첫째 아들 공부상서공 김계삼(金繼蔘)의 후손들이다.

대안군의 8세손 김봉모(金鳳毛)에 이르러 가문이 번창하기 시작하였다. 봉모(鳳毛)는 외국어에 능통하여 외국 사신을 접객하는 관반사(館伴使)를 맡아보았으며, 아들 김태서(金台瑞)는 고종 때 한림학사를 거쳐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에 이르렀으며 전주김씨의 시조이기도 하다. 또한, 그의 아들 김약선(공부시랑)·기손(평장사)·경손(추밀원부사) 3형제가 유명하다.

판도판서공파 파조인 김장유(金將有)는 대안군의 11세손으로 고려 멸망 후 충북 보은에 입향 은거하면서 세거하기 시작하였다. 보은지역의 경주김씨는 7세에 이르러 크게 번성하였다.

그 후손으로 김효정(金孝貞·정랑)의 아들인 김정(金淨)은 조광조(趙光祖)와 더불어 중종(中宗) 때에 지치주의(至治主義)의 실현을 위하여 혁신정치를 시도하다가 기묘사화(己卯士禍)가 일어나 제주도로 귀향 가다가 해남 바닷가 노송 아래서 회포를 달래며 소나무 껍질을 벗기고 적은 시가 전하며, 사약을 받을 때 절명사(絶命詞)를 남기고 서른여섯 살의 아까운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경주김씨 판도판서공파의 족보 목판은 1648년(인조 26) 무자보(戊子譜)를 완성한 후 1685년(숙종 11) 판각한 것으로 40매 중 23매만 전한다. 이 목판은 2009년 12월 4일에 충청북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③ (구)안동김씨(安東김씨)

대안군의 둘째 아들 공부시랑 김숙승(金叔承)의 후손들이다.

김숙승(金叔承)은 (구)안동김씨 시조로 고려 때 공부시랑과 평장사를 지냈다. 누대(累代)에 걸쳐 안동에 세거(世居)해 오던 안동김씨는 김숙승(金叔承)의 7세손 김방경(金方慶)에 이르러 가문이 번창하기 시작하여 고려 말엽부터 조선 중기(인조조)까지 상당한 세력을 떨쳤던 가문이다.

중시조 김방경(金方慶)은 삼별초의 난과 왜구를 토평하여 상락군 개국공신에 봉해졌으며, 우리나라 최초로 고려군 8천 명을 이끌고 일본 정벌을하였다.

(구)안동김씨의 중시조 김방경의 아들과 손자들이 고려 말에 크게 이름을 떨쳤으며, 조선 전기에는 김영후(金永煦)의 후손들이 크게 세력을 떨쳤다. 현재 15개 파가 존재한다. 그 중 김익달(金益達)의 제학공파, 김사렴(金士廉)의 안렴사공파, 김사형(金士衡)의 익원공파가 60∼70%를 차지한다.

또한 (구)안동김씨에서는 무인(武人)이 많이 배출되었다. 9명의 역대 충무공 중 2명이 나왔으며, 삼도수군통제사만도 10명이나 배출되었다. 2명의 충무공 중 하나가 임진왜란 때 진주대첩을 이끈 김시민(金時敏) 장군이며, 다른 한 명은 광해군 때 훈련대장으로 강홍립과 함께 후금(청) 정벌에 나섰다가 전사한 김응하(金應河) 장군이다. 그 외 원주목사로 원주성을 사수하다 전사한 김제갑이 있으며, 병자호란 때 성천부사로 있다가 순절한 김언(金言)도 있다.

(구)안동김씨가 몰락의 길을 걷게 된 것은 인조 때에 김자점(金自點)이 역모죄로 처형되면서부터이다. 김자점은 인조반정에 참가하여 공을 세운 후 영의정에까지 오르고, 인조의 딸 효명공주를 며느리로 맞는 등 권세를 휘둘렀으나, 인조가 죽고 효종이 즉위하자 탄핵을 받고 처형되었다. 이로 인해 선(구)안동김씨의 위세는 크게 위축되었다.

근대 이후 (구)안동김씨의 인물로는 백범(白凡) 김구(金九)가 있다. 3·1운동 후 상하이로 망명하여 내무총장, 국무령을 거쳐 임시정부 주석이 되었다.

➃ 김해군계 (金海君系 諱濂) 후예(後裔)

대안군의 셋째 아들 김해군(金海君) 김렴(金濂)은 고려조에 벼슬이 봉어(奉御)에 이르렀고 김해군(金海君)에 봉해졌다[20].

대표적인 김해군의 후예로는. 김해군의 후손으로는 첫째 품언(稟言)을 시조로 하는 수원김씨(水原金氏)가 있으며, 둘째 심언(審言)을 시조로 하는 영광김씨가 있다. 그 중 김품언(金稟言)이 거란의 침공을 토평하는 데 공을 세움으로써 수성군(水城君)에 봉해졌는데, 그 후손 중에서 수원김씨, 인동김씨, 용성김씨, 용담김씨, 서흥김씨, 한남김씨, 용궁김씨, 풍산김씨, 김녕김씨, 김해김씨(법흥파) 등이 생겨났다.

앞서 보듯이 김해군계는 대단히 복잡한 세계도를 지니고 있고 갈래를 파악하기가 쉽지 않다. 같은 시조의 후손임에도 다른 본관을 쓰는 경우도있고, 본관 명칭을 김녕김씨로 바꾼 이후에도 다른 성관을 이어오고 있는 혈족도 없지 않다. 대표적으로 김녕김씨, 수원김씨, 경주김씨(병판공파, 백촌공파, 익화군파) 등을 들 수 있다.

금녕김씨는 대안군의 9세손인 김시흥(金時興)을 시조로 하고 있다. 그는 고려 인종때 문과에 올라 한림을 거쳐 동북면병마사를 지냈고 벼슬은 광록대부평장사에 이르렀다. 북방방어를 튼튼히 한 공로로 주국상낙군개국남식읍천호(柱國上洛君開國男食邑千戶)를 하사받았다. 금령군(金寧君)에 봉해지고 후손들은 금녕(金寧)을 관향으로 삼았다.

김렴계의 김해김씨 법흥파와 김춘계의 김해김씨 법흥파가 있다. 김렴계 김해김씨는 경순왕 아들인 대안군 김은열의 아들 김렴을 시조로 하는 법흥파이며, 김춘계 김해김씨 법흥파는 백촌 김문기의 8촌 동생인 김춘(김해군수)이 계유정난을 피해 황해도에 숨어 살다 그 후손들이 평안도 법흥동으로 이주한 뒤 붙여진 이름이다.

태조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을 도운 김인찬을 시조로 하는 양근김씨(익화김씨)와 김해김씨 북청파, 경주김씨 익화군파가 있다. 익화는 경기도 양근(양평군, 양근과 지평군을 통합하여 양평군이 되었음)의 옛 지명으로 김인찬이 익화군에 봉해지면서 관향을 삼았다. 하지만 그의 아들 검룡(儉龍)이 훈련도감으로 제주도에 입도하여 제주에서 경주김씨 익화군파가 생겨나게 되었으며, 넷째 종남(從南·영의정 추증, 금성군)의 아들들이 함경북도와 남도에 거주하게 되면서 김해김씨 북청파가 형성되었다.

김문기의 후손을 자처하는 가문으로는 김녕김씨의 충의공파, 경주김씨 백촌공파, 김해김씨 백촌공파 등이 있다. 김녕김씨 충의공파는 김문기의 손자로 충립 등 6명으로 기록하고 그 후손임을 자처하고 있으며, 경주김씨 백촌공파는 김문기의 손자를 계훈(繼勳)으로 파악하고 그 후손임을 자처하고 있으며, 김해김씨 백촌공파는 김문기의 아들 현석의 이름을 흠(欽)으로 파악하고 그 후손을 자처하고 있다.

또 김준영(金俊榮)은 김시흥(金時興)의 13세손인데, 조선시대 임진왜란 때 왕을 호종한 공으로 호성공신(扈聖功臣) 3등에 녹훈되고 분성군(盆城君·김해 옛 지명)에 봉해졌다. 그 후손들이 김녕김씨 분성군파를 형성하고 있으며, 다른 후손들은 아예 분성김씨로 분적하기도 했다.

이외에 결성김씨(結城金氏·결성과 홍주가 통합되어 홍성군이 됨)가 있는데, 결성김씨에는 김예철(金禮哲)을 시조로 하는 상주파와 이조판서 김달손(金達孫)을 시조로 하는 위원파가 있다. 김예철은 김녕김씨 시조 김시흥의 11세손이다. 현대 인물로는 김영삼(金永三) 대통령이 김녕김씨 충정공파이다.

(4) 태사공파 약사 (太師公派 略史)

태사공파의 파조인 김인관(金仁琯)의 시호(諡號)는 문순(文純)이며, 고려(高麗) 예종(睿宗) 때 조산대부(朝散大夫)로 위위시경(衛尉寺卿)을 지내고 검교태자태사(檢校太子太師)에 올랐다. 아버지는 김양검(金良儉)이고 兄은 김인서(金仁瑞)이며  순종비 선희왕후(順宗妃宣禧王后)와 남매지간(男妹之間)이다. 배위(配位)는 정경부인(貞敬夫人) 이천서씨(利川徐氏)이며 욱(勗)의 딸이다.

태사공의 9세손 상촌 김자수(金自粹)는 가문(家門)의 중심인물이다. 김자수는 여말선초에 활약한 석학으로서, 일찍이 목은(牧隱) 이색(李穡)과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의 문하에서 학문을 익히고, 공민왕 23년(1374)에 이무방(李茂蒡)과 염흥방(廉興邦)의 문하에서 문과에 장원급제하여 벼슬이 좌상시(左常侍)에 이르렀고, 상촌은 여말선초 민본사상에 입각한 성리학적 정치이념을 현실 세계에 구현해보려 했던 유교 지식인이었다.

평소 예교(禮敎)를 바탕으로 한 공의로운 삶을 지향했던 상촌은 고려가 망하자 고려에 대한 의리를 지켜 충절을 다한 이색(李穡)·정몽주(鄭夢周)·길재(吉再)·이숭인(李崇仁) 등을 두문동(杜門洞) 72현(賢)의 한사람이다. 상촌공은 망국의 한(恨)을 안고 안동에 은둔하였다.

상촌공의 아들인 김근(金根)은 평양소윤(平壤小尹)의 벼슬을 지냈고, 후에 병조판서에 추증되었다. 네명(영년, 영원, 영전, 영유)의 손자 중 공평공(恭平公) 김영유(金永濡 )는 1446년에 문과에 급제하고 사헌부 대사헌, 지중추부사, 황해도관찰사, 공조참판, 형조참판 등의 벼슬을 역임하였다. 후에 이조판서에 증직되었고, 공평(恭平)이란 시호를 받았다. 김영유는 정치가, 관료로서 정치, 행정, 외교 등의 분야에 커다란 공적을 남겼을 뿐만 아니라 경륜가로서 뛰어난 면모를 발휘한 인물이다.

상촌공의 현손이며 기묘명현(己卯名賢)의 한사람인 십청헌(十淸軒) 김세필(金世弼)은 사림파의 동료들과 함께 이단의 배척에 앞장섰었다. 그는 불교의 폐단을 시정하고, 기은제의 폐지를 주장하였으며, 여악을 폐지하고 정악인 아악을 사용토록 하였고, 소격서의 혁파를 강력히 주장하여 관철시켰다. 양명학이 도입되었을 때에는 불교의 禪宗 영향을 받은 것을 갈파하고 이를 비판하여 성리학의 학통을 지켜나갔다. 또 훌륭한 인재를 스승으로 선발하여 성균관의 강의를 맡기도록 하여 성리학을 장려하도록 하였다. 세필(世弼)은 올곧은 선비의 생활로 일관하였으며 기묘사화(己卯士禍)가 일어나자 그는 조광조(趙光祖)를 구원하다가 훈구파의 탄핵으로 충주 유배당해 충주(忠州)의 지비천(知非川) 위에 살면서 학자촌(學者村)을 형성하고 살았다.

십청헌(十淸軒)의 아들 충민공 김저는 경연에 나가 강연을 하였고 퇴계 이황은 김저의 학문을 높이 평가하였다. 김저는 홍문관 저작(著作), 박사(博士) 등을 역임하고, 이조좌랑(吏曹佐郞)으로 옮겼다가 명종 초에는 사헌부 지평(持平)으로 있었다. 1545년에 을사사화가 나자 윤임(尹任)의 측근세력으로 지목되어 고성(固城)으로 유배되었고, 명종 2년(1547) 삼수(三水)로 이배되어 배소(配所)에서 39세의 젊은 나이로 사사(賜死)되었고, 가산까지 적몰 되었으며 가문은 크게 위축된다.

이렇게 위축된 가문세(家門勢)는 조선 중후기 상촌공의 손자 중 둘째 손자 좌랑공 김영원(金永源) 후손으로 상촌공의 8세손인 황해도 관찰사를 지낸 학주(鶴州) 김홍욱(金弘郁) 代에 이르러 다시 꽃을 피우게 된다.

학주(鶴州)公의 長兄 김홍익(金弘翼)은 병자호란 때 의병을 일으켜 전쟁에서 순절하였고, 아우 김홍욱(金弘郁)은 효종 때 황해도 관찰사로 있으면서 앞서 인조 때 사사(賜死)된 민희빈 강씨(姜氏)와 그녀의 어린 아들의 억울함을 상소하다가 효종의 노여움을 사 친국(親鞠) 중에 장사(杖死) 되었다.

김홍욱(金弘郁)의 손자 김흥경(金興慶)은 영조 때의 상신(相臣)이었고, 김흥경(金興慶)의 아들 김한신(金漢藎)은 영조 때의 부마(駙馬 : 영조의 딸 화순옹주와 혼인)이면서도 겨우 두 칸 집에 살면서 비단은 걸쳐 본 일도 없고 가마를 타는 법도 없이 청빈하게 살다가 아들이 없어 형의 아들인 이주(頤柱)를 양자로 삼았다.

참찬 이주(頤柱)의 손자인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는 학문에 있어서 실사구시(實事求是)를 주장하였고, 서예에서는 독특한 추사체(秋史體)를 대성시켰고, 특히 예서(隸書)와 행서(行書)에 새로운 경지를 이룩하였다.

이후 경주김씨는 (신)안동김씨 세력에 의해 중앙 정치 권력에서 밀려났다.

(5) 사승공파 소개 (司丞公派 紹介)

사승공파는 태사공의 11世 손으로 상촌공의 손자인 사승공 김영전(金永湔)을 派祖로 하고 있다. 아버지 평양소윤 김근(金根)은 첫째 부인인 밀양박씨 사이에서 장남 영년(판관공), 둘째 부인인 우봉이씨 사이에서 차남 영원 (좌랑공), 삼남 영전 (사승공), 사남 영유 (공평공) 두었는데 이중 삼남인 분이 사승공이다.

사승공의 아우인 공평공의 후손들이 조선 초중기에, 둘째형인 좌랑공의 후손들이 조선 중후기에 훌륭한 인물이 많이 배출된 것에 비하여 사승공의 후손들은 비교적 평범한 가문으로 살아온 것 같다.

사승공은 1447년 생원시에 급제 사헌부사승(司憲府司丞)이 되었다. 백관(百官)들이 직분에 충실 하도록 하였으며 장기간 일하면서 일 처리가 신속하였다. 사헌부사승의 직분을 다했고 유력한 분의 비리와 행실을 임금께 상소하였다가 꾸지람을 받고 전라도 영광군수(通訓大夫行 靈光郡守)로 가게 되었다.

사승공은 인품이 고명하여 어려서부터 경전들을 깊이 공부하시고 치민에 뜻을 두셨다. 성품이 강직하여 당사의 폐단을 바로잡고자 상소문을 올렸다가 임금의 노여움을 사서 유배 당하신 것인데 선생은 세태에 초연하여 유배지에 암자를 짓고 유유자적하였다. 영광군수를 마지막으로 관직을 떠나서 사남 생원공과 문의현(현 세종시 부강면 노호리,등곡리)에 자리를 잡으니, 자손이 대대로 세거하게 되었다.

사승공은 숙부인 함양박씨와의 사이에서 네아들을 두었는데 첫째 아들 김간(金 侃)은 공주 사마소(조선 중기 지방의 생원·진사들이 각 고을에 설립한 자체 협의기구)에서 활동하였으며 이를 계기로 공주에 세거(世居)하게 되었다. 묘소는 공주시 이인면 효제동에 있다.

둘째 아들 참판공 김의(金毅)는 字는 치홍(致弘). 관직은 한림삼사이랑지이조참의공조참판(翰林三司吏郞吏至曹參議工曹參判)이다. 배위는 宜人 전주이씨이며 차남 김창열(金昌烈)과 김광열(金光裂)을 두었다. 경북 의성에 집성촌이 있다.

셋째 아들 김건(金健)은 1439년(己未年)에 태어났으며 字는 언방(彦方). 관직은 통덕랑(通德郞)이다. 配位는 파평윤씨이며 외아들 進仕 김양기(金良基)를 두었다. 경북 안동에 집성촌이 있다.

넷째 아들 김부(金副)는 성종 元年(1469年) 장원 급제하였다. 조선 시대에 소과의 하나인 생원시에 합격하면 보통은 성균관에 입학하여 일정 기간 수학한 뒤, 대과인 문과를 거쳐 관직에 나아가는 것이 보통이나, 이를 포기하고 영광군수를 마지막으로 관직을 떠난 아버지와 함께 문의(현 세종시 부강면 노호리,등곡리)에 정착하였다. 배위는 순흥안씨이고 외아들 충위교위(忠毅校尉) 弘堅(홍견)을 두었으며, 후손들이 이 일대(존들)에 집성촌을 이루며 세칭 ‘존들 김씨’ 라 불리며 오백여 년 세계(世系)를 이어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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